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태왕의 침전 안에는 광개토태왕의 심복 중에 심복들만 불려 들어왔다.

국상이면서 연나부 부장인 을력소와 울절 밀운 장군, 태대사자 고척동과 조의두대형 연개남이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사관인 태사령 고사통이 죽간과 두루마리를 들고 들어왔다.

광개토왕이 이들을 보니 감개가 무량해 힘없는 눈이 가늘게 떨렸다. 평생 이들 장군과 함께 말 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천하사방으로 광개토경을 넓혔다.

태왕은 국상 을력소에게 말했다.

“태대형 고막리는 보이지 않구나. 왜 여기에 부르지 않는 건가.”

고막리 왕자는 태왕의 애첩 소향의 아들로 지인용을 두루 갖춰 젊은 나이에도 2관등인 태대형을 맡고 있었다. 고막리는 거련 태자와 보위를 경쟁할 정도로 출중한 인물로 태왕은 한때 고막리를 거련 대신에 태자로 삼을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국상이 태왕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장화왕후가 국상을 제지하고 나서며 말했다.

“폐하, 막리는 지금 멀리 남의 하국으로 내려가서 변방을 살피고 있어 부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안타깝구나.”

장화왕후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폐하께서 심복하는 중신들은 다 모였습니다. 먼저 태사령이 폐하께서 재위 기간 동안 이룬 위업과 사적을 말씀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거련 태자가 장화왕후의 말을 이어 명했다.

“태사령, 앞으로 나와 읽으시오!”

뒤에서 시립해 있던 태사령이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나와 죽간과 두루마리를 펴서 태왕의 업적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소신이 감히 사초에 기록된 위대한 폐하의 생애와 위대한 업적을 받들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국강상광개토호태왕께서는 고국양왕의 장자로 탄생하시어 어려서부터 총명해 문일지십을 하셔서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아명을 담덕이라고 했습니다. 담덕의 예덕은 공맹에 비길 정도로 크고 높아 백성들의 존망을 한 몸에 받았으며, 무용은 호랑이처럼 담대해 적들은 이름만 들어도 떨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열세 살에 태자로 책봉되어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백제, 후연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전쟁터에서 적들을 물리치며 용병술을 익혔습니다. 태왕의 용맹과 지략은 후연 거란 숙신 말갈 동부여 신라 백제 가야 왜를 비롯한 이웃나라에게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태자의 나이 17세에 고국양왕이 승하하시니 담덕 태자는 고구려 제19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후 우리나라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말 어원연구

연나부: 고구려 5부의 하나. 연나부, 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나부는 몽골어로 동서남북과 중앙을 가리킨다. 율령이 갖추어진 소수림왕 때부터는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로 한자어로 명칭이 바뀐다.

고구려는 가야, 신라, 백제를 하국으로 불렀다. 차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 국가, 한 민족, 한 경제공동체 안에서 지리적 아래 지방으로 인정해 한 일원으로서 하국이라 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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