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광개토태왕께서 왕위에 오른 그해부터 지금까지, 22년 동안 끝없이 이웃한 모든 세력들을 정복해 조그만 산골짜기 국가를 동북방의 패권국으로 변모시킨 위대한 정복군주이셨습니다.”

태사령 고사통은 침전에 누운 태왕 앞에서의 두려움 때문인지 태왕의 위업에 대한 감격 때문인지 떨리는 목소리로 사초를 읽어 내려갔다.

태사령이 읽은 사초 내용은 그릇되거나 과장됨이 없었다.

고구려 사관들이 실수와 과오 혹은 태타에 의해 태왕의 위대한 업적을 결락시키거나 깎았으면 깎았지 과장되게 부풀리지 않았다. 고구려 사초는 고주몽 동명성왕 이래로 객관적이고 엄정한 춘추필법을 사용한 사관들의 역사의식에 바탕한 기록이었다.

사초에 기록된 광개토태왕의 업적은 주로 정복활동에 국한된 것이었다.

394년 광개토태왕은 즉위하자마자 맨 먼저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에 대한 원한이 깊었고 또한 백제가 고구려의 왕위교체기를 틈타 잃어버린 대방군계를 회복하기 위해 북침한 까닭도 있었다. 태왕은 백제의 북변을 쳐서 석현성과 10성을 정복했고, 고구려를 7도로 재편한 뒤 이듬해 백제의 군사적 요충지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백제는 태왕의 위세와 용병술에 눌려 감히 대적조차 하지 못하고 패퇴했다. 즉위년부터 광개토태왕이 맹활약을 펼친 것은 그의 전과가 하루아침에 이룬 것이 아니라 태자시절부터 수많은 전투경험과 전공을 쌓아온 결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395년 태왕은 흥안령 시라무렌강 일대에 거주하는 북방 거란족인 패려를 공격하여 3개 부락 700영을 격파하고 무수한 소 말 양 등 가축을 노획해 돌아왔다.

396년 고구려군은 수륙양군으로 나눠 공격하는 백제 아신왕을 쳐서 대산한성 아단성 등 58성 700성을 함락시키고, 아신왕 일족 10명을 인질로 잡았으며, 남녀 1000명의 포로와 세포 1000필을 획득해 국내성으로 개선했다.

398년 태왕은 북쪽 국경지대인 백신토곡을 순시하고 숙신을 정벌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고 북변에 고구려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400년은 한반도와 동북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해이다.

이 해 한반도와 왜, 중국을 뒤흔든 여가전쟁이 일어났다. 가야제국의 맹주, 금관가야의 이시품왕은 김수로왕 이래 가야의 최고 번영기를 구가한 해상왕국의 군주였다. 가야는 최첨단인 철과 철제품, 낙동강 평야에서 나오는 풍부한 농산물, 바닷가에서 나오는 어류, 신제품인 가야도기를 비롯한 다양한 가사제품, 고급한 가야 술과 가야차, 불교와 관련한 세련된 가야불구품 등을 활발한 해상교역을 통해 수출해 막대한 부를 쌓고 강력한 군대를 길렀다.

세력이 커진 이시품왕은 자신의 힘을 믿고 자신과 경쟁해온 이웃 신라를 병합하기로 작정했다. 백제 아신왕의 후견을 얻고 왜의 용병을 사서 가야군은 신라를 침공해 내물 마립간을 포로로 잡고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점령했다. 모든 일이 이시품왕이 뜻한 바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신라 뒤에는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있었다.

 

우리말 어원연구
관미성: 각미성(閣彌城)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오두산성, 강화 교동도 등으로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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