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클래식, 귀 기울여 듣는 기쁨

 

첫 만남에 친구되기 힘들듯
음악도 수회 걸쳐 듣다보면
귀 열리며 진정한 기쁨선사

나는 오래 전부터 카페 겸 음악 강의실을 경영하고 있다.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으면 본의 아니게 사람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온다.

그 중에는 남의 말을 듣는데 너무 인색한 사람들이 많다. 특히 나이든 사람에게서 이런 현상을 자주 보게 된다. 대화의 80% 이상을 자기가 독점하는 사람은 소통을 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훈계나 넋두리를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귀는 열어라”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듯하다.

그런데 듣는 능력도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운동으로 근력을 키우는 것처럼 듣는 힘을 기르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 대목에서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탁월한 해법을 제시해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법은 배우는데 듣는 법은 배우지 않는다. 다른 이에게 귀 기울이는 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다. 음악은 바로 그 방법을 가르쳐준다.”

음악을 공부한다는 건 일차적으로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좋은 음악에 귀를 기울이면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음들이 마음 속에서 이미지를 이루며 꿈틀거린다.

좀 더 깊이 들어보면 이제껏 안 들리던 부분도 들리기 시작한다. 이런 현상은 사람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특히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귀 기울이는 힘이 많이 향상된다. 대중가요들이 대개 5분 남짓한 곡인데 비해 클래식 음악에선 감상시간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달라진다.

5분이 아니라 50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곡이 수두룩하다. 줄넘기 100회에서 마라톤 5㎞ 뛰기로 운동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강의할 때 “클래식은 엉덩이로 듣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엉덩이를 붙이고 시간을 내서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클래식 음악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클래식은 ‘기다림의 미학’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조금만 듣고서 귀에 안 들어온다고 타박한다.

기다릴 줄 알아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듯이 클래식도 기다릴 줄 알아야 들린다. 한번 기다렸다고 들리는 것도 아니다. 어떤 곡은 몇 번이고 들어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

그건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처음 만나자마자 정들어버리는 친구가 얼마나 되겠는가? 모름지기 친구란 시간의 시험대를 거쳐야 진가를 알 수 있는 것 아니던가?

▲ 조희창 음악평론가

음악도 마찬가지다. 5분 지나도, 50분이 지나도 지루하게만 느껴질 수 있다. ‘타고난 음악적 천재성’이 없는 한, 음악의 친밀도는 당신이 ‘엉덩이를 붙이고서’ 감상에 할애한 시간과 비례한다.

이처럼 듣기의 훈련을 거쳐 비로소 마음과 소통하게 된 음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준다. 피천득 선생은 ‘이 순간’이라는 시에서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래지 않아 /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 이 순간 내가 / 제 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조희창 음악평론가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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