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

▲ 궁전 광장에서 바라본 에르미타주 미술관(겨울궁전).

315년전 표트르대제가 궁전 첫 건축
뒤이은 표트르 3세, 즉위 6개월만에
부인 에카테리나 2세에 황위 뺏겨
진귀한 미술품 전시공간으로 확장

대형화재·2차세계대전 위기속에도
수차례 증축·수리로 명맥 이어져
세계 3대 박물관중 하나로 꼽혀

전시실 353곳에 전시품 300만점
최대 전시분야는 서유럽미술품
미술사 대가들 독립적 전용홀도 갖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역사는 315년 전인 1703년 표트르대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표트르는 불모의 땅이자 습지였던 그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모스크바 귀족들의 간섭을 벗어날 수 있고 북유럽과의 교역을 늘리기에 제격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12년 제국의 수도가 됐다.

▲ 유리병에 꽃힌 보석으로 만들어진 꽃다발(1750년대말·자수정,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 네덜란드 황옥, 홍석류석, 남옥, 터키옥 사용).

◇역사·건축·미술 3가지 관점

표트르 대제가 지금의 자리에 궁전을 세운 건 맞지만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용도와 규모는 아니었다. 현재의 엄청난 구조는 표트르 대제의 작은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궁전의 증축을 명령한 것이 단초가 됐다. 증축은 여제가 총애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라스트렐리가 맡았다. 천재건축가인 그는 약 2000개의 문과 창문을 만들어 그 건물을 몇번이고 반복해 돌아다니지 않고서는 전체적인 윤곽조차 파악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뒤이어 황위에 오른 표트르 3세는 여제의 조카였다. 하지만 6개월 만에 그의 부인에게 황위를 빼앗겼다. 그렇게 즉위한 에카테리나 2세는 또한번의 대대적인 증축을 추진하는데, 황제와 황족들의 생활공간 뿐만 아니라 온갖 진귀한 물품과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대폭 확장했다.

▲ 카노바의 ‘세명의 카리페스’

여제는 늘어나는 자신의 예술 컬렉션을 보관하기 위해 기존의 궁전에다 말르이(小 에르미타주)와 스타르이(大 혹은 舊 에르미타주), 이를 이어주는 라파엘 회랑, 에르미타주 극장 등을 덧붙여 짓게했다. 1764년 베를린의 한 상인으로부터 구입한 225점의 미술품이 도착하자, 여제는 그 날을 에르미타주의 새로운 설립일로 정했다. 10년 후인 1774년에는 회화, 조각, 공예, 서적 등 작품 수가 2000점에 이르렀고 이후로도 컬렉션은 계속 늘어났다.

1837년 위기가 찾아왔다. 대형화재로 궁전의 상당 부문이 사라졌다. 내외부가 상당히 훼손되자 대대적인 복구작업이 이뤄졌는데 새 건물은 이전의 건물과 구분하기 위해 노브이 에르미타주(新 에르미타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카노바의 중앙계단.

1852년 다시 개장한 이 건물에는 56개의 전시실이 갖춰졌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에는 군사혁명위원회의 법령으로 기존의 전시실 이외에 황실가족의 거처까지 국립박물관에 포함시켰다. 에르미타주의 대부분 공간이 전시공간으로 바뀌었고, 일부 황족과 귀족들에게만 허용되던 관람도 1920년부터는 일반에게 전격 개방됐다.
 

▲ 공작석 응접실.

에르미타주의 2번째 위기는 2차세계대전 무렵에 일어났다. 독일의 침공으로 히틀러와 스탈린이 세기의 대결을 펼치면서 약 300만명이 죽어나갔다. 이런 와중에도 스탈린은 에르미타주의 회화작품들을 열차에 실어 우랄 지역으로 긴급후송했다.

미처 가져나오지못한 물품들은 지하 깊숙한 곳으로 옮겼다. 다행히 1945년 이후부터 대부분의 작품들이 차례차례 원상복구됐다.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게 된 과정이다.

▲ 고대 회화사의 회랑.

이후로도 수차례의 증축과 수리를 거친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현재 353실의 전시실을 갖추고있다. 300만점에 이르는 전시품은 원시문화사, 고대그리스로마세계, 동방제민족문화, 러시아문화, 서유럽미술, 고화폐 6개 영역으로 분류된다.

그 중 가장 큰 규모는 전체 전시실 중 125실을 차지하는 서유럽미술이다. 르네상스에서 근세에 이르는 명화는 물론 대수집가 슈츄킨, 물로조프에 의한 프랑스 인상파 작품까지 소장목록에 모두 들어있다.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루벤스, 렘브란트, 로댕, 마티스, 칸딘스키, 피카소 등 미술사 대가들에겐 독립적인 전용홀을 갖추게 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 이름 앞에는 ‘인류의 보석상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 로코토프의 ‘에카테리나 2세 초상화’(1770년께 )

◇에카테리나 2세의 삶과 예술

‘에르미타주’(혹은 예르미타시)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로 ‘은둔자’를 뜻한다. 에카테리나 2세의 전용 미술관으로 지어진 이 곳을 두고 귀족들은 한때 ‘은둔의 장소’라고 조롱했다.

▲ 홍영진기자

그 말이 오히려 미술관의 공식 명칭으로 정착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녀는 독일의 작은 공국에서 태어나 러시아로 시집 온 뒤 황태자비, 황후를 거쳐 급기야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을 끌어내리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30여년 통치기간 동안 영토를 확장하며 대외관계를 이끄는데 성공했지만, 엄청난 남성 편력으로 재위기간을 총신(총애를 받는 신하)통치로 채웠다는 비판을 함께 받고 있다.

문화예술에 대한 그 자신의 취향을 앞세워 지금의 에르미타주를 있게 만든 공로도 있지만 이또한 본인의 눈앞에서만 러시아의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을 뿐, 정작 당대 백성들이 얼어붙은 동토 위에서 참혹한 생활을 이어가도록 내버려뒀다는 악평을 동시에 받고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는 유명 작품을 바로 눈 앞에서 관람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진귀한 보석과 장식물 앞에서는 입이 딱 벌어진다. 이와 함께 발을 뗄 때마다 이 공간을 있게 만든 장본인, 에카테리나 대제의 숨은 일화와 사생활을 엿보는 재미도 그 못지않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blo.co.kr

참고도서<세계 박물관미술관 예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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