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이후 맞이하게 되는 일상
세상을 바라 보는 시선을 바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기회로

▲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삶은 맹목적 충동으로서의 의지다. 서양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삶에 대한 명확한 목적이나 의미보다는 충동적인 의지에서 나온다는 뜻일 것이다. 어찌 들으면 평범한 이야기같은 이 말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오는 시기가 있다.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종료하는 정년 이후의 시간이 그렇다. 사회에서 부여해준 역할에 매달려 살다가 정년이라는 시기를 넘기고 나면 아무런 사회적 의무나 동기 없이 온전히 개인적인 영역에서 감정을 일으키고 행동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그 때 마주하는 가장 힘든 일이 기본적인 욕구와의 정직한 대면이다. 외부의 동기나 자극이 없어지면 내부의 욕구나 정서가 가장 크게 드러나고 그것에 생활이 휘둘리게 된다.

식욕도 그중의 하나다. 내가 만나는 몇몇 퇴직자들은 먹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서 자주 토로한다. 직장에 소속돼 있을 때에는 항상 같이 할 동료가 곁에 있고 먹는 일에도 어느 정도 사는 즐거움이 포함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먹는 일을 즐기고 의미를 발견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의례와 형식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최소한의 의례와 형식을 갖추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일찍 퇴직한 친구 한명은 이런 농담을 자주한다. 시민의 복지를 담당하는 시청이 나서서 퇴직자의 가장 필요한 애로사항도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혼자서 먹는 점심이 의미있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퇴직자 전용 식당을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 곳에 가서 아무런 불편 없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 하면서 식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호사스런 걱정이라고 웃고 말았지만 웃을 일만은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친구가 걱정하는 일은 일주일에 한번, 한 달에 한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마주해야 하는 일상이다. 또 이런 호사스런 걱정을 별일이 없으면 최소 20년 이상 계속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상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이 아무런 생산활동이나 의미있는 사회적 역할 없이 20년 이상을 살아가는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참고할 만한 사례가 많지 않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그 표본을 만들어 내야하는 첫 세대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진지한 대화나 담론을 들어본 적은 별로 없다. 누구나 말은 쉽게 한다. 100세 시대라고. 신문이나 방송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얼마가 필요하다거나 어떤 보험을 들어야 한다거나 하는 재정적인 조언이 전부인 것 같다. 재정적인 걱정만 해결되면 그 다음은 별일 아니라는 계산이다. 인간의 희로애락 원인을 염두에 둔 정확한 진단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민을 행동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이들도 있긴 하다. 한 달에 몇 번 골프를 치면 삶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고 1년에 몇 번 여행을 하면 삶이 풍요롭다고 평가하는 이들이다. 여행이 일상의 진부함을 말끔히 걷어내 줄 것이라 믿으며 경제적인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씩씩하게 어디론가 떠나는 이들을 보면서도 걱정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 눈에 비치는 외부의 풍경을 바꾸는 것으로 마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지 물어 볼 수는 없었다. 또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도 않을 것이다. 진정한 여행은 5대양을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어느 사상가의 말을 자주 떠올린다. 퇴직 후의 시간이야말로 멀리 떨어져 세상에 대한 나의 시선이 정확한 것인지 물어 보기에 가장 적당한 때가 아닐까. 퇴직 후 큰 마음 먹고 시작한 것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주위에서 다 늦은 나이에 무슨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또 그것이 가능하냐고 내 의도에 의심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는 지난 몇 달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내가 배운 외국어로 그 나라의 문학작품을 번역없이 읽어 보는 것이다. 아마 그것이 그 나라의 정신과 역사를 깊이 느껴보는 진정한 여행이 아니겠는가.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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