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의 품질·안전성 위협하는
저가 설계비 악순환 벗어나야
부실시공·안전사고도 줄어들것

▲ 손진락 전 대한건축사협회 울산광역시회장

사람에게 필요한 의·식·주를 대형마트, 백화점 또는 인터넷 주문을 통해 쉽게 취득할 수 있는 요즘이다. 주거문제 또한 공인중개사 또는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방문해 계약 또는 분양신청을 하면 된다. 돈만 있으면 되는 세상이지만 생활의 필수 요건인 의·식·주 가운데서 주(住)가 지니는 가치가 얼마나 중요 것인지 건축사의 입장에서 말하고 싶다.

건축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한번 정도는 자기 집을 지어 살고 싶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주택이나 상가 등을 직접 건축하고자 할 때 공인중개사나 시공자를 통해서 건축사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은 정해진 공사비를 기준으로 저가 책정된 설계비를 제시하는 대리인(시공자 등)과 마주하게 된다. 자기 집을 짓는다는 것은 평생에 손에 꼽을 기회지만 건축주가 어떤 설계를 원하는지, 상세한 요구사항은 무엇인지는 저렴한 건축이라는 명목 아래 들어볼 기회조차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건축설계는 부지의 형상에 따라 또한 건축주의 개성(個性)과 경제 사정에 따라 건물의 평면과 형태가 달라지는데 기본적으로 기능적인 충족과 안전에 대한 기준은 지켜져야 된다고 본다.

저가 공사비가 건축물의 안전과 품격을 넘어 환영받는 현 세태는 IMF 외환(경제)위기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가 곤두박질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수요에 힘입은 중국의 저가 건축자재 대량 유입은 폐쇄적인 건축계에 더욱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건축 관계자 중 가장 많은 마진을 남겼던 시공자는 줄줄이 부도를 맞았고, 급격히 줄어든 일감에 건축사들은 제 살을 깎아 먹는 행위인줄 알면서도 설계비를 낮추었다. 그 결과 건축사들은 적은 일감을 수주할 수 있었지만 건축시장 전체적으로 설계비가 급격히 하락하는 현재의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전 변호사, 세무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건축사의 위상은 이제 시공자가 일감을 주면 설계 도면을 그려주는 일개 사무소 대표(소수의 건축사)로 종속적인 입장이 되었고, 건축사의 설계를 거쳐 합리적인 시공자를 찾는 순리적인 건축은 저가 시공을 부추기는 시공자들의 경쟁에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

변호사와 세무사의 사무실 출입문 또는 테이블엔 시간당 상담료에 대한 문구가 있다. 상담자는 당연히 지불해야 된다고 인식, 상담료를 지불하든지 계약을 통해 일감을 의뢰하게 된다. 하지만 건축사는 상담 비용을 받지 않는다. 상담 후 찾아온 건축주에게는 계획 설계 도면까지 제시한다. 하지만 건축주는 설계비가 저렴한 건축사에게 최종 의뢰를 하게 된다. 또한 일부 건축주는 실시 설계까지 의뢰, 설계가 완료될 시점에 설계자를 바꾸어 같은 동료인 건축사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는 일도 가끔 생기곤 한다. 건축주가 본인의 부지(토지)에 대한 좋은 건축설계 안을 선택하기 위해 여러 조건을 비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건축물의 설계를 위해서 대지에 건축할 수 있는 여건과 건축법 및 관련법령을 조사해 반영하고 그것을 도면으로 나타내는 과정은 단순히 물건의 단가를 비교해보는 과정과는 결코 다르다는 것을 이해 할 필요가 있다.

오래전부터 공공발주에서도 공사비라는 큰 항목에 설계비를 끼워 넣는 식으로 발주, 부실 설계·시공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얼마전 포항지진의 영향으로 건축물의 안전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정동영 의원이 건축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가, 지자체, 공공기관 등이 발주하는 공공발주사업에 대해서는 건축사의 업무(설계·감리)에 대한 적정한 대가 지급을 의무화하고, 민간발주사업에 대해서는 적정한 대가 지급을 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건축물의 품질과 안전성을 위협하는 주요한 원인인 ‘저가 설계·감리비에 따른 부실 설계·감리’라는 악순환 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취지로 추진된 것으로 환영할 일이지만 한편으로 공공발주사업보다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민간발주사업의 최소한 설계·감리 대가 기준을 의무화하였으면 요즘 급속히 증가하는 민간건축물의 사고가 현저히 감소하리라 생각한다. ‘싸게싸게’ ‘빨리빨리’만을 외치는 발주문화에서 벗어나고 예산에 맞춰 용역비를 깎는 발주관행, ‘저가(低價)설계’의 악순환을 끊어야만 부실시공과 안전사고의 덧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손진락 전 대한건축사협회 울산광역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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