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
(찬란하게 빛나는 섬=‘스리랑카’의 뜻)

▲ 스리랑카 갈레의 아침, 한 어부가 거친 파도 속에서 장대낚시를 하고 있다. 최소한의 장비로 고기를 잡는 그들에게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가 느껴진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황금사원의 승려, 원주민인 베다족(도끼족), 찻잎을 따는 일꾼들, 쪼그려앉아 기도하는 여인, 담볼라 시장의 상인들.

불교 국가지만 여러 종교 인정
힌두교 신상·불상 함께 놓고 경배도
삶 속 다양한 문화·종교 공존
핀나웰라 ‘코끼리 고아원’
고산지대 최고급 홍차 ‘실론티’
미끼 없는 장대낚시 ‘갈레의 어부’
다양한 문화로 기억되는 곳
고달픈 삶 속에서도
여유있는 미소의 사람들과
눈을 편안하게 하는 차밭들로
스리랑카의 기억은 아름답기만해

‘스리랑카’는 싱할라어(스리랑카 공용어)로 ‘찬란하게 빛나는 섬’이라는 뜻이다. 동남아시아 해상실크로드의 요충지였고 인도양의 진주라고 불릴만큼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인도문화의 영향으로 불교와 힌두교 등 고대문명이 풍부하게 녹아있는 문화의 보고이자 세계 굴지의 보석 산출국이기도 하다.

스리랑카는 기원전 6세기경 인도 북부에서 건너온 싱할라족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왕국을 이루었다. 16세기 이후로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아픔을 겪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하게된다. 옛 원주민인 베다족(도끼족)은 싱할라족이 들어온 이후 정글로 들어가 숨어지내며 어렵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인구수가 극도로 줄어들어 이제는 전체 인구의 1%도 되지않는다. 사냥도 금지돼 먹고 살기가 더욱 힘들어지면서 어렵게 삶을 이어간다.

해가 질 무렵 스리랑카 TV에는 예불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이 나라에서 종교는 종교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있다. 스리랑카는 인도와 가까워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불교국가이지만 여러 종교를 인정하고 있다. 제의에서는 힌두교 신과 불상을 함께 놓고 경배한다. 어느 신을 모시느냐가 아니라 믿음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가족의 안녕과 구원을 바라는 기도는 간절함을 너머 절박함을 보인다.

스리랑카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같은 역사의 흐름 속에 생성된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그들 삶 속에 어떻게 녹아있고 공존하는지였다.

◇고대도시의 사원과 궁전

고대도시 시기리야의 작은 마을 담불라에는 어느 고대 왕의 슬픈 사연이 서려있다. 이 곳에는 높이 200m나 되는 화강암 봉우리에 옛 왕궁 유적지가 있다. 바로 광기에 사로잡혀 아버지를 살해했던 카사피 1세가 후환이 두려워 세운 곳이다.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1200여 개 계단을 올라가야 시기리야 록(Sigiriya Rock), 일명 사자 바위(Lion Rock) 꼭대기에 만들어진 왕궁 유적지에 올라 설 수 있다. 왕은 미천한 출신의 후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출신의 한계 때문에 맏이임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물려받지 못할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결국 왕은 아버지를 산 채로 묻어 왕위를 찬탈한 뒤 형제까지 죽이려했지만 실패했고, 이 곳 시기리야에 몸을 숨겼다. 형제들과의 싸움 속에서 왕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져버리며 삶을 마무리했다. 버려진 왕궁에는 두려움과 슬픔의 그림자만 남아있다.

또다른 유적지, 루완웰리세야 대탑과 담불라 황금사원도 둘러봤다. 나는 그 곳에서 스리랑카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신을 위하기 보다 사람을 향해 있다는 생각을 갖게됐다. 2200여 년을 견뎌 온 석굴사원은 절대적인 풍경보다 상대적인 시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억겁의 세월을 버틴 유적지보다 그 앞을 지나치며 올렸을 수많은 사람들의 짧은 기도가 어쩌면 더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고대도시 시기리야의 왕궁 유적지로 오르는 계단.

◇고유문화 간직한 캔디

열대의 다습한 해안에서 벗어나 고산지대로 이동했다. 18세기 싱할라왕조 최후의 수도였던 캔디에 이르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곳은 ‘캔디문화’라고 불리는 스리랑카 고유의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도시의 중앙에는 인공호수가 있고, 호수의 북쪽 면에는 석가모니의 치아가 봉납된 달라다 말리가바 사원이 있다. 스리랑카의 수상이 취임식을 할 때는 꼭 이 사원에서 참배를 한다. 고원에 지리해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교통과 산업,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 곳에는 핀나웰라 코끼리 고아원이 있다. 북구의 밀림 지역이 반군과 정부군 사이의 오랜 내전으로 황폐화되자 사람들은 모두 떠났고 빈 마을을 코끼리가 차지했다. 내전이 끝난 뒤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놓고 코끼리와 싸워야 했다. 이로 인해 어미를 잃은 새끼 코끼리들이 많아졌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코끼리 고아원이 만들어졌다. 원래는 야생 적응법을 가르친 뒤 밀림으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지금은 관광사업에 투입 돼 고아원 우리에 갇힌 채 살아가는 운명이 됐다.

▲ 이수루무니 라자 마하 사원.

◇홍차의 대명사 ‘실론티’

스리랑카의 옛 이름은 ‘실론’이다. 그래서 스리랑카에서 나는 차(茶)를 ‘실론티’라고 부른다. 해발 1600~1800m에서 가장 좋은 차가 나오는데, 스리랑카에서도 특히 고산 지대인 누워러 엘리야의 찻잎이 가장 우수하다고 한다. 현재 스리랑카는 세계적인 홍차 생산국이지만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최대 산업은 ‘커피’였다. 어느 날 실론에 발생한 병해때문에 대부분의 커피밭이 전멸했다. 이 때 커피를 대신할 작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홍차였다.

◇새벽녘, 갈레의 어부

해가 뜨기 전, 아직 여명 조차 없을 때 미리 예약한 툭툭이를 타고 미리사해변 끄트머리 장대 낚시터로 향했다.

아직 미명인 그 시각에 사람들은 생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 때를 지켜보던 그들이 한두명씩 차례로 차가운 바다에 맨몸으로 들어간다. 그들이 가지고 간 것은 젖지않도록 비닐봉지로 꼭꼭 감싼 옷 한 벌과 미끼도 없는 낚시바늘, 가느다란 낚시대가 전부였다. 장대에 앉아 아래를 바라보면 물고기떼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않고 미끼 없이 바늘만 달린 낚시대를 당겨 물고기를 건져낸다.

차가운 바다에 해가 떠오르면 이내 바다는 따뜻해진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힘들고 고달프다. 아침나절 내내 잡은 물고기로 겨우 하루를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삶에는 여유가 느껴졌다.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어올리자 담배 한 개비를 내놓으라며 어깃장을 놓다가 이내 큰 웃음으로 포즈를 취해줬다.

▲ 핀나웰라 코끼리 고아원.

◇특별한 스리랑카

▲ 안남용 사진가, 다큐멘터리작가

스리랑카 각 도시를 연결하는 기차를 탔다. 가만히 앉아 동승한 사람들의 미소를 가까이에서 오래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기차 안의 풍경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는 기차는 우리의 삶처럼 흘러가는 듯 했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 스리랑카의 기억은 아름답기만하다. 여행내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푸른 차밭을 품은 스리랑카의 자연은 여행 내내 나의 눈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스리랑카가 어떠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특별한 곳’이었다고 말한다. 스리랑카를 여행하게 된다면 그들의 미소와 초록의 자연 속에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남용 사진가, 다큐멘터리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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