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 사고는 암덩어리만 양산
웃픈 억지로 민의 왜곡 말고
새로운 지자체를 믿고 따랐으면

▲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계속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전세계 이목을 끌고 온갖 예상을 비틀며 만날 듯 안 만날 듯 밀당하던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미팅은 결국 일어났고, 그 범위와 시행에 관한 논란여지가 있지만 비핵화에 기초한 공동선언까지 끝마쳤다. 다음날 실시된 지방 선거와 국회의원보궐 선거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적으로 여당이 압승했다. TV에서 본 개표방송 결과는 우리나라가 일당독재국가가 된 것이라 말해도 될 만큼 온통 새파란 세상이었다.

미래에 관한 예측은 깨지라고 존재한다. 세상이 언제 우리의 예측대로 돌아간 적이 있었나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시간을 거슬러 일촉즉발의 긴장을 뚫고 이뤄진 남북정상회담도 그랬고, 평창올림픽의 대 흥행과 컬링이라는 예상 밖 국민인기 종목의 탄생도 그랬고, 2016년말 온 나라를 뒤덮었던 촛불정국과 박근혜정권의 몰락도 그랬다. 늘 예상 밖의 범위, 믿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으로 세상은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한다. 다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예측대로 돌아간다는 강한 자기신념으로 ‘역시 그랬어’ 혹은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며 합리화시켜놓을 뿐이다.

변증법적 논리에 따르면 정-반-합으로 이루어지는 순리에 의해 세상이 돌아간다. 우리가 무리없이 생각하는 예측, 그럴듯한 미래가 ‘정’이라고 하자. 그 반대편 축의 끝에 해당하는 정황은 ‘반’이다. 세상은 그 ‘정’과 ‘반’의 뒤섞임이나 대립의 결과물로 일어나는 ‘합’이라는 결과다. 세상의 다이나믹한 정도는 ‘정’과 ‘반’사이 거리에 비례한다. 예측이 무난하고 큰 반대가 없는 사안은 거의 예상대로 굴러간다. 격론이 오가고 파장이 큰 이슈는 아무리 양 끝단 경우의 수를 미리 따져본들 충격파가 큰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아니 인류는 늘 예측가능한 미래를 원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불확실성을 줄일수록 생존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점괘를 보기도하고, 미래예측에 관한 수많은 분석들을 종합해 계획을 짜는 이유다. 잘 맞는 미래를 내놓는가에 따라 용한 점쟁이와 신뢰받는 컨설팅 기업도 생겨났다. 그들이 말하고 계획한대로 모든 미래가 착착 다가오면 세상 더없이 편하겠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점괘가 빗나가고 세상이 예측대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참 많다. 되물어보고 원인분석을 요청하면 무슨 ‘변수’가 발생한 탓이란다. 왠지 그런 논리기반의 미래 예측이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는 또 그 변명같은 분석을 믿는다. 역시 용하고, 역시 신뢰가는 분석이라며 ‘불발 예측’을 잊어버리고 또 다음 미래를 묻는다. 결국 믿음으로 모든 미래를 낙관하고 자기합리화도 하는 긍정의 버릇이 생겨나는 논리다.

의심과 불신 같은 부정적 요소들은 사실 더 많은 경우의 수를 마련케 하고 미래 적응성을 키워주는 순기능을 한다. 하지만 말그대로 ‘부정적’ 성격이 훨씬 크다. 검증이라는 명목으로 논지와 상관없는 이슈를 만들어 후보의 자질을 논하고, 도넘는 비난이 난무하는 정치권 행태를 떠올리는데 채 0.1초도 안걸린다. 정치판은 해운대 모래알 한알같은 한가지 예시일 뿐 ‘나는 안그래요, 우리는 안그래요’라고 하는 우리 일상도 똑같다. 과연 이로운가라는 관점으로 생각해보라. 노력을 들여 부정성을 키우고 그것으로 미래에 가져다 붙이는 행위가 말이다. 기회비용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 얼마든 좋은 계획을 짜고, 미래를 주시할 시간과 노력을 검증이라는 핑계로 낭비하는 꼴이다. 한 수 더 떠 검증들을 쌓아 아예 미래까지 점친다. 부정적 사고는 무수한 암덩어리만 양산할 뿐이다.

자꾸 북한이 핵을 포기 안할 것이라는 둥, 과시욕 앞선 트럼프 대통령과 속셈을 숨긴 김정은 위원장의 보여주기식 쇼에 놀아났다는 둥 그러지 말고 그냥 믿어보면 안될까? 과거에 쭈욱 이러이러했으니 미래도 이럴 것이라는 통계나 예측이 맞았다면, 북핵문제가 생기기도 전에 세상은 핵전쟁 몇 번을 했을 것이다. 일당독재가 된다는 둥, 나라가 큰일 났다는 둥하며 웃픈억지로 민의를 왜곡하지 말고, 이왕 밀어줘서 새로 바뀐 나라와 새 지자체의 리더십을 믿어보면 좋겠다. 각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도, 연구자의 노력도 좀 믿어보면 좋겠다. 우리 사이 인간관계도 상대가 하는 말을 제발 믿어보면 좋겠다. 예측하고 단정짓는 버릇은 개나 줘버리고 말이다. 그놈의 종이영수증 찾아 붙이며 진땀 흘리는 수고도 결국 믿음부족 탓 아니겠는가? 세상 다이나믹스를 버티고 돌파할 수 있는 기제가 바로 믿음이다. 물론 믿고 안믿고와 상관없이 세상은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미래로 미래로 끊임없이 진행되지만. 밑져봤자 본전 아니겠는가? 믿는자에게 복이 있나니.

정연우 UNIST 디자인·공학 융합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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