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등 타인 시선 영향 받기도
과거 버려야 진정한 미래 설계
실천으로 진정성도 인정받아야

▲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길거리 곳곳에 붙어 있는 낙선인사 플래카드는 당선감사 인사보다 더 많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인사문구를 보아도 당선자 보다는 낙선자가 훨씬 더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더 낮은 자세로 섬기겠습니다’ 제일 흔한 문구중 하나다. 앞의 문장은 지지자에게 대한 감사 인사일 것이다. 다음 문장은 아마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것 같다. 앞으로 4년간 더욱 낮은 곳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얻도록 노력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낙선 인사의 문구를 찬찬히 본 경험은 올해가 처음이다. 지금까지의 낙선인사는 대부분 정치초년병이거나 정치에 참여하고 싶어도 당선가능성과는 거리가 있는 정치인들의 안타까운 호소였다. 그래서 내용을 음미하지 않아도 대충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올해의 낙선인사는 경우가 다른 것 같다. 지금까지 보아온 낙선 정치인들과는 무게가 다른 현역 정치인들의 낙선 인사 플래카드는 그냥 쉽게 넘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문장의 단어들은 다르지만 뜻은 대부분 비슷한 것 같다. 앞으로 4년은 와신상담하면서 시민들을 더욱 잘 섬기겠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낮은 자세로 봉사하는 지역인사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은 지역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경험이 많은 시민들이 많아진다는 것도 지역의 잠재력을 높이는 일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지역사회의 변화뿐만 아니라 개인의 환경변화를 경험하면서 여러가지 많은 생각이 일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무게있게 다가오는 말이 역지사지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현역 공직생활을 마치고 보낸 몇 개월의 생활은 공직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민의 눈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조직 생활의 흔적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조직 생활을 떠나도 몇년 동안 혹은 평생 조직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간다. 작은 완장이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주위에서 공직이나 기업체에서 퇴직한 지인이 있으면 현역 때의 직함을 그대로 불러준다.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거나 딱히 부를 만한 명칭이 마땅치 않아서다. 특히 연하의 사람들이 퇴직한 선배를 이름으로 부르기는 더욱 힘들다. 그래서 철지난 직함을 그냥 지니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직생활을 끝내고 맨 먼저 주위에 부탁한 것이 그것이었다. 철지난 직함으로 불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므로 이름을 불러달라는 주문이었다. 이름 뒤에 선생 정도 붙이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별로 틀린 말은 아니다 싶어서다. 그래도 어색해하는 사람이 많아서 택한 방법이 호를 정하는 것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느끼는 어색함을 줄여 주기 위해서였다. 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후배들을 만나면 그들은 철지난 직함을 부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호로 불리어질 것이다. 흔적을 없애는 것은 우리 사회 관습상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철지난 직함으로 불리어지는 것보다는 현재의 위치에 맞는 이름으로 호칭되는 것이 정직한 일이다.

단순히 호칭의 불편함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은 자기 스스로의 결정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영역도 만만치 않다. 우리 모두 매일 경험하고 있는 일이다. 특히 관직에서 물러나 낮은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다짐한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철지난 직함을 버리는 일이다. 그 것이 다짐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고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진정성을 인정받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항상 현재형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생각을 만들어 내는 기반은 대부분 과거의 흔적이거나 미래에 대한 꿈이다. 종교적 성찰을 체득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현재의 상황에 대한 솔직한 대면이나 미래에 대한 깊은 성찰보다는 화려한 과거의 기억을 떠나지 못한다. 지금의 위치가 어려울수록 더욱더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한 경우가 많다. 미래에 대한 설계는 역사에 대한 냉정한 평가에서 비롯되듯이 한 개인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꿈에 대한 실현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정직한 평가와 더불어 현재의 실천력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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