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년대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기여했던 노동자들의 처절한 삶을 재조명 해야

▲ 김여숙(의류학과 교수, 창원대 자연대 학장 )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  몸은 피곤하지만 여유가 있으면 어디를 가볼까 설레게 되는 것이 촌놈(지방에 사는 사람)이 된 후 생긴 습관이다.  두세 시간의 여유를 위해 서울에서 가 볼만한 곳을 뒤적이다 눈에 띄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이음피움’봉제 역사관이었다.

이름도 예쁘지만 봉제 역사관이라니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전공하는 분야라서 더욱 호기심이 당겼다.

친구와 함께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을 찾아 나섰다. 종로구 창신동 4가에 위치한 봉제역사관은 알림판이 작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봉제역사관이 설립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좁은 골목길을 찾아올라가니 창신동 봉제거리 박물관의 안내판도 있고, 봉제용어 8가지 및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 등 봉제와 관련된 글들이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창신동 중턱에 이르니 재봉틀 모양 같기도 한 새로 지은 작은 건물이 나타났다. 바로 봉제 역사관이 있었다. 안내하는 분이 나와서 반갑게 맞이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단번에 알 수가 있었다. 개관한 지 몇 달 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2018년 4월 11일 문을 연 4층으로 된  봉제 역사관은 아직 소박하기만 하였다. 자료를 모으기도 어렵지만 봉제 산업 역사가 일천하여 자료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봉제공들이 먹고 살기 바빴기 때문에 흔적을 남길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에 사료가 없다고 하니 이해가 간다. 

지하1층은 봉제작업실이 있고 1,2층은 봉제 관련 자료와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며, 3층은 봉제 장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4층 테라스에서는 창신동 산등에 다닥다닥 기대어 있는 집들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카페가 있었다.  이 봉제 역사관은 서울시에서 옛것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닌 기억과 가치를 되살리려고  20곳을 선정한 서울의 명소인 ‘잘생겼다! 서울20’에 선정된 곳이다.

60년대 평화시장의 대부분 옷 가게는 앞에는 옷을 판매하는 가게로 되어 있지만 그 뒤는 봉제공들이 옷을 제작하는 작업실이 있었다. 그 작업실은 봉제공들이 먹고 자는 생활공간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겨울이면 난로를 피우고 쪽잠을 자고, 여름이면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찜통더위를 이겨가면서 일을 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처우에 항거하면서 분신한 전태일 열사도 바로 봉제공이었다.

그로 인해 노동 환경을 개선하면서 야간에 시장 내에서 숙식을 금지시키자 이들이 모여 든 곳이 바로 창신동이다. 창신동은 동대문 시장과 평화시장과 접근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봉제공장이 모여 있기 때문에 디자이너로부터 작업 지시서를 건네받으면 짧은 시간에 옷을 만들어낼 수가 있었다.

일종의 봉제 산업의 벨리라고 할 수 있다. 패턴작업만 하는 공장, 단추만 다는 공장, 다름질만 하는 공장 등 분업화된 공장들을 오가면서 순식간에 옷 한 벌이 완성되는 벨트가 형성된 셈이다. 지금도 창신동 골목에는 1000여개가 넘는 봉제 공장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5·60대 전후 세대들의 숙련된 봉제 기술을 전승하고 이어나갈 후속 세대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20-30대 젊은 세대들은 열악한 처우와 환경 때문에 봉제 기술을 습득하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봉제 기술과 전통이 단절되어 가고 있다. 

60-70년대 봉제공들은 열악한 환경이지만 혼자 힘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 갈 수 있었고, 80년대에는 쏟아지는 주문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번성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중국의 값싼 의류 제품이 들어오면서 봉제공들이 만든 국산 의류의 수요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봉제공의 공임은 다른 직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열악해졌다. 어떤 제조업이든지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전문적인 기술자가 장인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면 그 직종은 쇠퇴하거나 사라지게 된다.

우리 봉제공들이 가지고 있었던 봉제 기술의 노하우가 사라지게 되면 수주처는 외국에서 찾게 된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면면히 이어온 우리나라 봉제공의 장인 정신과 봉제 기술이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우리만의 봉제공의 독특한 노동 문화와 노동의 역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음 피움 봉제역사관’은 우리의 봉제 역사와 문화, 기술을 보존 계승하는 데 매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공자로서 더 욕심을 낸다면 ‘이음피움’의 역사관이 더 널리 알려지길 바라고, 더 많은 사료들을 수집해야 하며, 봉제 과정이나 역사, 용어 등에 대한 연구가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전공자뿐만 아니라 더 많은 국민들이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늘과 실이 이어지고 새로운 옷을 피워내듯이 사람과 사람이 이어져 소통이라는 꽃을 피워내길 바란다. 

60-70년대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기여했던 노동자들의 처절한 삶을 재조명하고 그들의 삶의 문화를 남기고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김여숙(의류학과 교수, 창원대 자연대 학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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