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선임기자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이육사 ‘청포도’(1939)

장마에 ‘쁘라삐룬’까지 울산을 훑고 지나갔다. 청포도(靑葡萄)는 태풍이 그친 후에 그 청신(淸新)함이 더욱 빛난다. 상북면 등억마을 필자의 마당에는 신불산의 바람을 타고 청포도가 송글송글 맺혔다.

풋포도의 해맑고 고귀한 정신은 우리가 동경하는 세계다. 그 포도송이에 민심과 도덕과 양심과 평등과 사랑이 영글어서 전설이 됐다. 등억에 사는 나는 늘 기다린다. 청포(靑袍:푸른빛의 도포)를 입고 찾아오는 그를. 은쟁반에 청포도를 듬뿍 올리고 전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포도는 기원전 3000~3500년 전부터 재배됐다. ‘포도’라는 명칭은 서아시아지방의 원어 ‘Budow’(포도)에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의 유럽산 포도는 1901년 프랑스 신부 안토니오 콩베르가 안성에 교회를 지으면서 처음 들여왔다.

▲ 오만원권에 있는 신사임당 <포도>, 출처:간송미술관.

오만원권 신사임당(1504~1551) 초상 뒤에는 7월의 ‘포도’가 있다. 굵고 작은 포도알의 모양과 색깔이 마치 물감을 칠한 것 같고, 줄기는 그 싱싱함과 늙음이 먹의 농담으로 쉽사리 파악된다. 특히 포도나무는 겨울 내내 죽은 듯 서 있다가 마침내 잔가지가 부서지면 그 틈에 파란 눈을 낸다.

“사람들의 눈에는 좌절의 빛이 떠오르고, 굶주린 눈에는 분노가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의 포도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청포도가 발표된 그 해이자 미국 대공황(1929~1933)이 발생한 그 시기, 빈부의 격차가 하늘을 찌를 때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존 스타인벡, 1939) 인기 또한 하늘을 찔렀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하늘에서, 땅속에서, 거리에서 터져나왔다. 톰 조드는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로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을 찾아갔으나 대지주의 횡포만 가득한 지옥이었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게 화두로 떠올랐지만 정작 빈부차는 오히려 더 커졌다. 상가 영세상인들의 불만이 커지고 경기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해졌다. 경제정책이란 게 지표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내고장 칠월, 분노의 포도가 익는다. 이재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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