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란 삼산초 교사

경상도에 사는 ‘안덕기’라는 학생이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서울로 전학 간 첫날 담임선생님께서 ‘덕기’를 친구들 앞에 소개하려고 이름을 물었다. “너 이름이 뭐니?” 그러자, 덕기가 대답했다. “안덕깁니더~” 그러자, ‘안들립니다’로 잘못 알아들은 새 학교 담임교사가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고?” 덕기 역시 큰 소리로 “안덕깁니더~”하고 외쳤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교사가 다시 큰 소리로 “너 이름이 뭐야?”하고 외쳤고, 덕기 역시 목소리가 작아서 그러는 줄 알고 죽을 힘을 다해 “안덕깁니더~”하고 외쳤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생각난다. 경상도 방언과 서울 표준어의 차이를 그럴싸한 말장난으로 표현한 재미난 이야기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먼저 사용하게 되는 감각이 청각일 것이다.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주변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접하면서 다양한 감각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엄마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해 내고, 자신의 울음소리를 통해 욕구를 전달하기도 한다. 소리를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새롭고 자극적인 소리에 점점 귀를 기울이며 소리를 흉내 내고, 그 결과 언어습득능력을 가지게 된다.

요즘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겪는 어려움 중에 과거의 학생들보다 듣는 힘이 많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집중력의 차이일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기본자세가 형성되지 못한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현대의 지나친 소음과 고성능 이어폰이나 스피커의 영향으로 청각이 손상된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학생들의 산만한 듣기 태도가 학습을 방해하고 의사소통에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오는 것이 사실이다. 한 시간 수업 중 아무리 집중의 박수를 치고 구호로 ‘경청’을 외치게 한들 그 때 뿐이고, 입으로만 ‘경청’일 뿐 듣기의 주인공인 귀는 도대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Q&E수업에서 ‘설명하기’단계가 있다. 질문을 만들고 서로 질문을 주고 받으면서 모르는 문제를 해결한다. 공부한 내용을 자신만의 비법으로 노트에 구조화하여 정리하고 그것을 다른 친구들에게 설명한다. 설명이 알아듣기 쉬우면 칭찬도 해주는 활동이다. 유태인들은 하브루타를 통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기를 반복하면서 모르는 것들을 스스로 배운다. ‘설명할 수 없으면 안다고 할 수가 없다’고 가르친다. 우리의 아이들은 어떠한가?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들으면서 의문점을 발견하고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낼 창조적인 귀를 가지고 있는가?

잘 말하고 싶으면 우선 잘 들어야 한다. 우리가 ‘듣는다’라고 할 때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도대체 잘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하루 종일 남의 이야기를 듣는다. 듣는다는 것은 타인의 생각을 듣고 감정을 보려고 애쓰며,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발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상대방의 말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배려가 될 것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마음을 보듬어주는 따뜻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상대방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자. 그 속에 무언의 응원과 격려가 담겨 있다. 이정란 삼산초 교사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