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영웅’ 박상진 의사 공적 재평가해야-(상) 공적평가 객관성 의문

▲ 광복회 초대 총사령을 지낸 고헌 박상진 의사 생가 전경.

박 의사 서훈 ‘독립장’ 불과
일제 무단통치 절정인 시절
광복회 통해 항일투쟁 견인
독립운동사 상징적인 인물
부사령관 김좌진은 1등급

박상진 의사는 일제강점기 삼엄한 무단통치가 이어지던 시기에 항일 무장투쟁을 이끄는 등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되지만 박 의사의 독립운동 공적을 평가한 서훈등급은 고작 ‘3등급(독립장)’이다. 특히 박 의사가 조직한 광복회 부사령을 지냈던 김좌진 장군의 서훈등급은 대한민국장 1등급인 점을 감안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는 비단 박 의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검증, 재심사 등을 통해 이들의 공적이 재평가될 수 있도록 상훈법 개정이 이뤄져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이유다. 울산출신으로 한평생 나라를 위해 애쓴 박상진 의사의 공적을 재조명하고 서훈등급의 현실과 개선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기획물을 두차례에 걸쳐 싣는다.

難復生此世上(난부생차세상) 두번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幸得爲男子身(행득위남자신) 남아 대장부로 태어나는 행운을 얻었건만
無一事成功去(무일사성공거) 이룩한 일(조국광복) 하나도 없이 저승길 나서려니
靑山嘲綠水嚬(청산조녹수빈) 청산은 날 조롱하고 물길조차 비웃는 것 같구나
­박상진 의사의 옥중 청취서 中

광복회 초대 총사령을 지낸 울산출신 고헌(固軒) 박상진(1884년 12~1921년 8월) 의사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중에서 지은 시다. 모든 것을 던져 조국 독립을 위해 힘썼음에도 ‘이룩한 일 하나 없다’며 안타까워하는 절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 고헌 박상진 의사.

◇서훈박탈 친일행위자보다 낮다

3일 국가보훈처 등에 따르면 현재 국가유공자 서훈 총 5등급 중 울산출신 고헌 박상진 의사의 서훈등급은 3등급 독립장이다. 독립장은 총 823명이 있다. 박상진 의사보다 높은 1등급 대한민국장에는 김구와 안창호, 이승만 등 30명이 있으며, 2등급 대통령장에는 이동녕, 신채호, 이범석 장군 등 93명이 있다.

박상진 의사의 서훈이 3등급으로 결정된 것은 지난 1963년이다. 서훈기준은 상훈법에 따라 ‘공적이 국가와 사회에 미친 효과의 정도와 지위, 그밖의 사항’을 고려해 결정되는데, 국가보훈처는 “박상진 의사의 서훈등급은 당시 공적심사위에서 독립운동으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한 사실과 독립운동의 참여 정도, 당시의 지위,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결정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박상진 의사의 공적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으로 이뤄졌는지, 또 적절한 훈격을 받았는지다.

지난 2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돼 서훈이 박탈된 인촌 김성수도 박상진보다 훈격이 높은 2등급 대통령장을 받았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1등급 서훈을 받았다.

반면 항일무장운동을 이끈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를 비롯해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열사, 6형제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이회영 선생 등은 3등급 독립장에 추서돼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대다수 일반적인 시각과 역사가들의 평가와는 다른 평가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훈격 낮아 대통령 화환도 못받아

역대 대통령들이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의 추모제 등에 대통령 이름의 꽃을 한번도 보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의전 규정에 따르면 대통령명의 화환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대통령장(2등급) 기념행사시 근정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3등급 훈격인 박상진 의사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박상진 의사와 같은 독립장인 유관순 열사의 경우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상징성과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해 유일하게 지난 2015년부터 대통령 화환이 근정되고 있다.

박상진 의사와 그가 총사령으로 있던 광복회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성우 충남대 교수는 “광복회의 의미와 역사가 곧 박상진 의사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를 살펴보면 1910년대 일제 무단통치가 이뤄진 시기가 가장 살벌했던 때였는데, 박상진 의사는 그 시기에 국외보다 더더욱 독립운동하기가 힘겨웠던 국내에서 광복회를 조직해 전국적으로 지부를 두고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등 광복회 초대 총사령으로서 갖는 상징성이 남다르다”며 “광복회의 의열투쟁은 향후 김원봉의 의열단 조직에도 영향을 주는 등 독립운동 역사에서 의미가 크다. 광복회 부사령 김좌진 장군이 만주로 가게 된 경위도 결국 광복회 총사령이던 박상진 의사가 만주로 파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준호기자 kjh1007@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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