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노동존중도시, 노동문화권 보호부터

▲ 이강민 울산미학연구소 봄 대표
물리적인 노동존중 표현

문화적 권리에서 시작해

노동자문화공원 있었으면

민선 7기, 송철호 울산시장은 “노동은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상생의 파트너이고, 노동을 비용으로만 계산하고 사람에 대한 존중은 생략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고 노동을 존중하는 울산을 만들겠다”며 “초중고에 노동교육을 의무화하여 헌법에 규정된 노동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고할 것”이라고 했다. 어떤 정책제안에도 노동의 ‘노’자만 들어가면 쳐다보지도 않았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정권교체의 실감이 난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Giorgio Agamben)에 의하면 “폴리스는 ‘벌거벗은 생명(homo sacer)’에 의해 존립할 수 있지만, 그들은 무권리로써만 폴리스 내부에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노동이 울산을 최고 부자도시로 만들어주었음에도 상은 고사하고, 해마다 임금협상 때만 되면 모두가 노조 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악마화해 왔다. 임금협상은 법에 보장된 권리임에도 ‘강성노조’라는 말로 폭력성을 상징화했고 ‘귀족노조’라는 딱지를 붙여 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끌어냈다. 이러한 상징폭력은 노동을 공동체 바깥으로 게토(ghetto)화 했으며, 그들의 불온한 문화는 사라졌다. 노동자는 시민으로부터 격리되었다. 노동자들은 함께 있으나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되었고, 가정에서조차 ‘돈 버는 기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노동존중도시, 어떻게 현실화 할 것인가. 무엇보다 우선은 지금 현실의 노동자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존재증명은 바로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게 하는, 감각적으로 가능하다.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공동체 내에서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위계적 공동체의 감각은 이미 존재(신체)들의 이름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과제를 부여받도록 분할되어 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가 정규직·비정규직 할 것 없이 2만여명 이상이 잘려나가고, 부당한 쌍용차해고노동자가 30번째 자살을 해도 그 아픔은 그와 가족들의 것일 뿐, 우리 사회가 그 상실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감각의 분할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노동존중은 ‘노동은 신성하다’라는 관념적 측면에서 그치지 말고,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표현되어야 한다. 호모 사케르를 역설적으로 ‘신성한 자’라고 한 것도 그 당시 풍습이었던 것을 생각해보자.

따라서 노동존중은 감각되는 노동자들의 문화적 권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인간의 존재의 정당성은 인권과 시민권으로 대표되어왔지만, 21세기에는 문화권으로 인간 가치를 존중하는 시대다. 세계는 문화다양성을 새로운 가치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모든 국민에 대한 문화권을 법으로 명시했다. 부산에는 민주공원이 있다. 민주공원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한 부산시민의 자부심이 됐다. 반백년동안 울산을 대한민국경제수도로, 세계적인 도시로 알려온 울산 노동자들의 자존감을 위해, 자녀들과 가족들이 함께 그 수고를 인정해주고 격려해줄 수 있는 장소, 노동자문화공원 하나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강민 울산미학연구소 봄 대표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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