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현 남목중학교 교사

얼마 전부터 매일 저녁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쓴 <행복론>을 필사하고 있다. 유명한 고전인 만큼 수많은 번역자들에 의해 다양한 판본들이 출판돼 있다. 이 중 내가 선택한 건 왼편에 세네카의 글이 있고, 오른편에는 필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글의 내용을 한 줄씩 읽어가며 옆에다 바로 베껴 쓸 수 있는 필사 다이어리-북이다. 하나의 문장을 베낄 때마다 세네카의 정갈한 가르침에 비추어 나의 오늘, 나를 스쳐간 감정들을 돌아본다. 고인이 된 지 오래인 노학자의 말을 들으며 자기반성을 하는 느낌이 그리 나쁘지 않다.

난데없이 필사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오랜만에 찾아온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올해 새로운 부서로 이동을 하게 되면서 3월부터 5월까지 쉴 틈 없이 많은 업무가 쏟아졌다. 몸은 바쁜데 업무는 물론 수업도 더 나아지지 않고 정체돼 있는 것 같았다. 주어진 일들을 최대한,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데도 늘 힘에 부쳤다. 1교시부터 그날의 식단표를 확인할 정도로 급식을 애정하는 나이지만 슬럼프가 지속되자 우리 학교의 자랑인 맛있는 급식조차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디데이를 세기 시작했다. 여름방학 디데이.

디데이를 세다보니 방학동안 하고 싶은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하고 싶은 일들이 점점 많아지자 이 중 몇 가지는 꼭 적어두고 실천에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이 되지 않았으나 예정보다 조금 일찍 <행복론>을 쓰기 시작했고, 들어야 할 연수들과 읽어야 할 책들과 지켜야 할 약속들을 차례대로 적었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다보니 슬럼프는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다시 기운이 났다.

방학(放學). 인터넷 검색창에 검색하니 학업을 쉰다는 의미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방학이 다가오면 아이들만큼이나 선생님들도 설렌다. 내가 원하는 대로 오롯이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기쁨은 아이들보다는 오히려 선생님들에게 더 클 것이다. 절친한 선생님 한 분은 방학이 있다는 장점이 사범대학 진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나 또한 방학이 교직의 매력 중 하나임을 잘 알고 있다. 이따금씩 지인들과 대화하면서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할 때마다 들었던 마지막 말은 늘 “그래도 너네는 방학이 있잖아”였다.

일반적으로 1~2주 간의 휴가기간을 갖는 직장인들과 비교해볼 때 한 달 남짓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은 자연스레 선생님들을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든다. 절대적으로 매우 긴 휴가기간이다. 그럼에도 모두가 방학이 길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방학의 의미도 지극히 상대적이다. 월급 다 나오는 휴가일 수도 있고, 다음 학기를 준비하는 자기 계발의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단계부터 삐걱거리는 과로 사회 대한민국에서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비해 선생님들이 방학을 통해 재충전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네카는 말한다. “우리는 수명이 짧은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오. 인생은 충분히 길며 잘 쓰기만 하면 우리의 수명은 가장 큰 일을 해내기에도 넉넉해요.” 벌써 나부터 뜨끔하다. 절대적으로 긴 시간이면서 상대적으로도 긴 시간이 될 수 있는 방학. 어떻게 보내야 진정으로 잘 보내는 것일지 고민해볼 시점이다.

이정현 남목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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