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규홍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인문대 학장

‘일청전쟁(日淸戰爭)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더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티끌뿐이라.’ 1906년 친일 작가 이인직이 만세보에 연재한 ‘혈의누’ 첫 구절이다. 일청과 청일이 무엇이 다른가. 2018년 6월12일,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만난 역사적 순간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서로 적대국가로 죽일 듯이 험악한 말들이 오고간 사이가 아니었던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 세계에서 유일하게 누구나 함부로 갈 수 없는 곳. 전쟁의 피비린내가 산천을 덮쳐 수백만이 죽어간 지 육십 팔년이 지난 이곳. 그래서 세계는 온통 북미 정상과 미북 정상의 만남으로 눈이 쏠렸던 것이다. 그런데 두 정상의 만남을 ‘북미 정상’이라 해야 하나, ‘미북 정상’이라 해야 하나. 너무나 상식적인 명칭처럼 보이지만 북미와 미북의 명칭은 엄연히 다르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두 나라 이상을 합쳐 부를 때 각 나라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쓴다. 이것을 전문적으로 혼성어(blend)라고 한다. 그 가운데 앞 머리글자를 따서 부르는 것을 ‘머리글자말(acronym)’이라고 한다. 두 말이 하나로 합쳐져서 하나의 낱말을 만드는 합성어가 될 경우도 앞에 오는 말과 뒤에 오는 말의 자리도 무의미하게 놓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에 오는 말은 뒤에 오는 말보다 중요하고 힘이 있고 말하는 사람과 친밀도 높은 등 여러 가지 도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심리학자 쿠퍼와 로스는 ‘나 먼저원리’라고 하였다.

여기저기, 이리저리, 오늘내일, 자잘못, 높낮이 등 긍정적인 의미이거나 화자와 가까운 시간과 장소의 말을 먼저 두게 된다. 남녀, 부부와 같이 남성 중심 의식이나 노소와 같이 서열의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두 기관이나 단체 또는 지역을 합쳐서 부를 때는 앞뒤에 놓인 글자에도 나름 뜻이 숨어 있다. 힘이나 세력의 중심에 따라 부르는 경우는 세력이 큰 기관이나 지역을 앞에 두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서울을 중심으로 이름이 붙여진다. 경부, 경의 등 서울을 나타내는 ‘경’ 자가 늘 앞에 놓인다. 두 학교 이름을 붙일 때도 자기 학교 이름을 앞에 놓는다. 예를 들면 연세대에서는 연고전이라 하고, 고려대에서는 고연전이라 한다. 다리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거가대교라고 해야 하는지 가거대교라고 해야 할지 지자체마다 이름을 두고 다투기도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도 한일월드컵인가 일한월드컵인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불어로 c가 j보다 먼저 나오기 때문에 한일월드컵으로 부르기로 한 것은 공식적 합의이지만 이면에는 결승전을 일본에 양보하면서 얻은 이름이 한일월드컵이다. 두 이름을 합쳐 부르는 일이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말이다. 남북을 말할 때 우리는 남북이라고 하고, 북한은 북남이라고 한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를 합쳐서 말할 때는 한중일, 중국은 중한일, 일본은 일중한이라고 하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졌다. 세 나라가 같이 회의를 할 경우도 2013년 제5회 한·중·일문화관광회의, 제5회 중·일·한 문화부장회의 제5회 일·중·한문화대신회의라고 썼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을 말할 때도 중일이라 하고, 러시아와 일본을 말할 때도 러일이라고 한다.

북미와 미북은 어떤가? 냉전체제가 심화될 1990년까지만 해도 대부분 언론이나 공공기관에서는 북미가 아닌 미북이라 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대부분 언론과 국가기관에서는 북미라고 말한다. 물론 몇몇 신문과 방송에서는 미북이라 하고 있다. ‘북미’든 ‘미북’이든 어느 한 쪽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언론사의 사조나 관점이 다르고 우리와 북한의 관계, 우리와 미국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도 관련되어 있는 듯하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나라잃은 시대 부왜인들은 모두 일청이나 일한이라고 했다. 우리나라가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도 일본은 당연히 일한합병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우리도 한일합병이라고 불렀던 어리석은 역사가들이 있었다. ‘북미와 미북’ ‘미북과 북미’ 나는 뭐라고 하고 있는지 나름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공자의 정명(正名)을 다시 생각할 때다.

임규홍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인문대 학장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