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태 교수 "고려 아닌 신라 통일기 제작"

▲ 청주 운천동 사적비. [연합뉴스 자료사진]

충북 청주 운천동 우물터에서 1982년 3월 발견된 '운천동 사적비'(雲泉洞寺蹟碑·충북유형문화재 제134호) 제작 시기를 놓고 학계에서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이 소장한 운천동 사적비는 일부만 남아 있으며, 현존 비석은 길이 95㎝, 폭 92∼93㎝, 두께 18㎝다. 삼면에 새긴 글자 중 약 160자가 판독된 상태다.

운천동 사적비는 '합삼한이광지'(合三韓而廣地)와 '수공이년병술'(壽拱二年丙戌)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86년 수도 경주와 먼 청주 지역에도 삼한일통(三韓一統·신라, 고구려, 백제는 하나) 의식이 퍼졌음을 알려주는 사료로 활용됐다. '수공'은 당나라 측천무후 연호인 수공(垂拱)과 발음이 같고, 이 연호에 따르면 수공 2년은 686년이다.

하지만 윤경진 경상대 교수는 2013년 발표한 논문에서 비석에 남은 문자 가운데 '아간'(阿干)은 신라 말기에 사용한 표현이고, '사해'(四海)라는 말도 7세기 후반 당에 사대를 취한 신라가 쓸 수 없었다는 점에서 비석 제작 시기는 신라 중기가 아닌 나말여초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지난 12∼13일 열린 한국목간학회 워크숍에서 운천동 사적비가 건립된 시점은 고려가 아닌 신라 통일기라고 반박했다.

윤선태 교수는 "나말여초 제작설 근거 중 사해 같은 비문 내용은 비석 자체가 온전하지 않다는 점에서 명징하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며 "최근에 운천동 사적비 서체가 남북조(420∼589) 해서(楷書·정자체)라는 점에서 나말여초 유물이 될 수 없다는 견해가 제시됐는데, 이에 십분 동의한다"고 말했다.

다만 윤선태 교수는 '아간'이라는 표기 방식은 매우 의미 있는 문제 제기였다고 인정했다.

그는 "지금까지 확인된 신라 금석문을 보면 '아간' 표기는 675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진다"며 "이후에는 내내 '아찬'(阿飡)이라고 하다가 헌덕왕 때인 815년을 기점으로 표기가 다시 '아간'으로 바뀐다"고 설명했다.

즉 윤경진 교수가 나말여초 제작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 중 '아간'은 상당히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선태 교수는 금석학자인 고(故) 임창순 선생이 과거에 "제1행 '아간' 등의 자형은 제2행인 주성대왕(主聖大王) 이하 글자보다 현저히 작다. 이것은 그 내용이 연속되는 문장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고 했던 지적에 주목했다.

그는 "'아간' 표기가 있는 측면의 1행은 글자 획이 2행보다 좁고 얕아서 두 행을 동일한 사람이 새겼다고 볼 수 없다"며 "청주 호족이었던 '아간'들이 지역 권력으로 성장해 후대에 자신의 이름을 추가로 새긴 것으로 추론된다"고 주장했다.

윤선태 교수는 "수공 2년은 문맥으로 볼 때 윤경진 교수 의견처럼 절이 창건한 시기를 지칭하는 것이 맞지만, 비석 건립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목간학회 워크숍에서는 충남 부여 쌍북리 한옥마을 조성부지에서 나온 백제 사비도읍기(538∼660) 논어 목간에 대한 발표도 진행됐다.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 한지아·김성식 부연구위원은 논어 학이편 1장과 2장 일부를 적은 사면(四面) 목간을 소개했다. 이 목간은 길이가 28㎝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를 포함해 글자 40여 자가 있다.

한 위원은 "논어 목간은 띄어쓰기를 분명히 한 점이 특징"이라며 "글자 중 '역'(亦) 자는 왕희지 필체와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사년(丁巳年)이라는 글자가 있는 또 다른 목간에 대해 "목간과 같은 층위에서 나온 토기를 볼 때 정사년은 657년이 유력하지만, 필체가 무령왕릉 묘지석과 유사해 597년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경상일보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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