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백남준 아트센터

▲ ‘위대한 예술가’의 작업실은 어떤 모습일까. 경기도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에는 뉴욕의 백남준 스튜디오를 그대로 옮겨 와 ‘백남준 메모라빌리아 2002’를 조성해 놓고 있다. 아래 사진은 타계한 백남준 부부와 아트센터 전경, 대표작품들.

곡선 구릉 사이에 모자이크 형태의 건물
작품들만큼 인상적인 백남준아트센터
‘메모라빌리아 2002’등 대표작품 전시
그의 맥 잇는 신진작가들 작품전도 마련
6·25전쟁 발발에 일본으로 피난 떠난뒤
30여년간 독일·파리·뉴욕서 예술활동
‘비디오아트’ 개척자로 미술계 획 그어
최근 홍콩경매시장 출품돼 또다시 주목

7월20일은 ‘위대한 예술가’ 백남준이 태어난 날이다. 황금기를 달리던 60대 초반에 그에게 뇌졸중이 왔다. 2006년 죽을때까지 약 10년 간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살아있다면 올해 86세 생일을 맞았을 것이다. 문화부 기자로서 고백컨데 무지, 나태, 때로는 주변 여건에 휩쓸려 저지른 실수들이 없지 않다. 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것을 하나 꼽으라면 주저없이 ‘백남준’서라 하겠다. 조금만 더 공을 들였으면 분명 살아생전 그를 만나는 기회가 있었을텐데, 그가 죽기 전에 그 스스로가 들려주는 삶과 예술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한번이라도 들었다면 어땠을까 두고두고 후회됐다. 유작이 된 그의 모든 작품과 마주할 때마다 이토록 절절하지는 않을텐데 되뇌이곤 하게 된다. 죽은 뒤 나온 그의 어록에 이런 말이 남아 있었다. ‘레오나르도만큼 정확하게, 피카소만큼 자유롭게, 르누아르만큼 다채롭게, 몬드리안만큼 심오하게, 폴록만큼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만큼 서정적으로!’ 예술을 사랑한다고, 우리 사는 곳이 문화도시이기를 바라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 같았다.

 

예상은 했지만, 최근 경기도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를 방문했을 때도 그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그의 숨결과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백남준 메모라빌리아 2002’ 앞에서는 아예 한참을 발을 떼지 못했다. 메모라빌리아는 백남준의 예술적 거처였던 뉴욕 브룸 스트리트 스튜디오를 재현한 작업이다. 백남준은 말년에 병세가 악화된 이후에도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작업을 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스튜디오에는 작가가 사용하던 작업 도구들과 모니터 그리고 즐겨읽던 책들과 영수증까지 백남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물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작품으로 재현된 벽면은 그가 머물렀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얼룩이 거뭇거뭇했다. 60여 점의 가구와 600여 점의 오브제, 그리고 300여 점의 지류가 그 앞에 놓여져 있다. 백남준아트센터로 그의 스튜디오 공간을 통째로 옮겨 온 이유는 그의 손때가 그대로 묻어있고 그가 생전에 지녔던 삶의 태도와 작업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의 개관 이후 센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주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지상 3층과 지하 2층으로 돼 있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백남준이 죽기 전인 2001년부터 백남준미술관 건립을 기획했다. 국제공모전을 거쳐 독일 건축가의 제안한 디자인을 채택했고, 이 건물은 주변 완만한 계곡의 곡선 구릉 사이에 모자이크처럼 딱 들어맞게 끼워진 형태로 들어앉아 있다. 천장과 벽은 빛의 투과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특수유리로 만들어졌다. 미술관 외부의 일부 벽면은 반투명막으로 처리되어 내부에서 상영되는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을 외부에서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1층 로비에서 시작되는 백남준의 작품은 센터의 각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심히도 마주친다. 소장품을 바꾸어 보여주는 것과 함께 백남준의 맥을 잇는 신진작가와 국내외 작가들의 설치미술전도 기획전 형태로 보여진다. 현재는 ‘30분 이상’이라는 기획전이 진행되고 있다. 오는 9월 말까지 지속된다니, 올 여름 휴갓길에 센터를 방문한다면 관람 할 수 있다. ‘30분 이상’은 백남준이 비디오아트에 담았던 소통의 메시지를 보여주자는 취지라고 한다. 독특한 전시제목은 백남준이 자신의 텔리비전 브라운관 작품을 만든뒤 제발 30분 이상 지켜봐 달라고 요청한데서 가져왔다.

 

세계를 휘젓던 백남준이 고국 한국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게된 건 1980년대 후반부터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그 당시, 이미 홍콩과 싱가포르를 오가며 무역업을 했던 부친은 조선땅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그는 가마를 타고 유치원을 다녔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온 가족은 일본으로 피난을 떠났다. 세계현대미술 흐름을 뒤바꾼 그의 대학전공은 아이러니하게도 미술이 아니라 음악(작곡)으로 시작돼 철학으로 이어졌다. 이후 한국행 대신 독일로 떠났고 파리로, 뉴욕으로 30여 년을 방랑하며 그만의 퍼포먼스와 아이디어로 ‘황색 재앙’이라는 충격적 이미지로 서양미술계를 뒤흔들었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비디오아트’의 신세계의 문을 연 그의 작업은, 장르의 경계가 모호한 오늘날의 초 현대미술이 있기까지 그 누구도 무시못할 굵은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잠잠하던 백남준이 요즘 또다시 회자되고 있다. 그의 작품 ‘알렉산더 대왕’이 지난 5월 홍콩 경매에서 6억2000만원(454만 홍콩달러·이하 수수료 포함)에 낙찰됐다고 알려졌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백남준이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또다른 대표작 ‘다다익선’ 역시 1988년 설치 할 때만큼 미술계의 관심이 다시 쏠리고 있다. 2003년 모니터를 전면교체했고 2016년에도 일부 교체했으나, 누전에 따른 화재·폭발 위험이 제기되자 최근 가동을 전면중단했기 때문이다. 안전성이 지적된 미술품을 새 부품으로 교체해야 하는지, 그렇다면 그 것이 진정 백남준 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혹시 모를 철거 결정이 새로운 파장을 일으키는 건 아닌지 등 갑론을박이 길어지고 있다.

 

홍영진 문화부장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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