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정

1962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출생인 김창현 후보는 어린 시절엔 공부잘하고 리더십있는 모범생, 대학시절 학생운동에다 군복무 직후 위장취업과 구속, 이후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경남도의원과 민선 동구청장에 당선되기도 한 지역내 진보세력과 노동계 정치세력화의 대표적인 젊은 기수로 평가받고 있다.

 김후보는 4살때 부친이 춘천대학(현 강원대학)에 근무하게 되자 춘천시내에서 10리쯤 떨어진 시골마을로 이사 가 유년을 보낸 뒤 초등6년때부터 서울에서 중·고교와 대학을 보냈는데 고교때까지 전교 학생회장과 반장 등을 빠지지 않고 맡은 모범생이었다는 것.

 김후보는 "어린시절 기독교적 가풍 등에 영향받아 정의로운 언행을 익혔고, 전교 최상위권의 성적으로 수재라는 소리도 들었다"며 "초등학교와 중학때는 전교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고교 3년간은 반장을 맡아 합창단 중창단 등 동아리활동에 열중해 학교나 교회행사때 단골로 불러다녔다"고 회고했다.

 부모가 울산으로 이사한 가운데 고려대에 진학한 김후보는 교내에 경찰이 상주하는 분위기속에서 1학년말(81년) 입영훈련에 반대한 소위 "문무대 사건"으로 친구들이 구속되는 상황을 보고 "학생운동에 동참하던 입장에서 주도적으로 앞장서는 역할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3학년 2학기때 당시 "학도호국단"을 총학생회로 바꾸자고 추진한 학생의날 시위를 주도했다는 명목으로 연행돼 강제징집을 당했고, 군복무 뒤 1986년에는 곧바로 S알루미늄에 위장취업해 노조결성을 주도하다 구속되는 등 상당히 파란만장한 길을 걷게 됐다.

◇주요 경력

김후보는 이후 4개월 수감된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곧바로 구로와 영등포지역에서 일어난 소위 "서울 남부지역 노동자사건" 주도혐의로 또다시 구속돼 1년6개월 가량 복역했다.

 김후보는 이후 복학 뒤 졸업직전인 1988년말 부모가 계신 울산에 내려와 사회선교실천협의회 간사역할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부설 민족학교를 설립해 강의했으며, 89년엔 울산 새날여는청년회 창립주도에다 현중노조 128일파업 지원팀의 교육선전부장 등을 맡기도 했다. 또 90년 동구 남목동에 사채와 은행융자로 학원을 설립한 이후 동구사랑실천운동연합, 좋은아버지모임, 상아탑주부대학과 한글교실 등을 주도했고 산재자·해고자자녀를 위한 장학사업 등도 벌였다.

 김후보는 이같은 활동을 바탕으로 1995년 실시된 경남도의원 선거에 당선돼 울산광역시 승격운동 등에 동참했고, 98년 실시된 초대 민선 울산동구청장 선거에서도 당선되면서 정리해고 반대투쟁 등을 했으나 취임 23일만인 7월23일 소위 "영남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돼 만 2년 복역했으며, 출소직후인 2000년 8·15광복절에 복권됐다. 이후 민주노동당 울산시지부장, 신자유주의 저지·민중생존권쟁취 울산본부 공동대표를 맡아오고 있다.

 김후보는 세번 구속과 도의원·구청장 당선 등의 경력과 관련,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주인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일관된 소신과 철학으로 생활해왔다"고 말했다.

◇약점과 반론

김후보에게 "한명뿐인 광역시장직을 맡기엔 연륜과 경륜이 부족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시장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철학과 소신이며, 그 외에는 국·실장 등의 풍부한 행정경험 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정책적인 판단능력이 있으면 된다"면서 "과거의 그릇된 경험이나 경륜은 차라리 없는게 낫고, 30대 서울시장후보가 나왔듯이 41살의 나이는 시대흐름상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고 답했다.

 김후보는 또 "학원을 운영하는 경영자 입장에서 노동자를 대변하겠다는 것은 모순일 수도 있지않느냐"는 물음에 "일제때 항일운동가 중에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듯이 중요한 것은 어느 계층이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신념과 철학"이라고 말했다. 송귀홍기자 khsong@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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