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왕복 한 시간 거리의 약수터를 다녀온다. 숲길로 들어서서 고개 하나를 넘고, 2차선 도로를 건너 다시 산을 넘어가는 곳이다. 날씨가 춥고 바람이 찰수록 등산의 묘미가 더해서 칼칼한 공기를 마시며 혼자 걷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두 번째 고개에서 나를 제지하는 사람이 생겼다. 빨간 외투를 입은 "산불아줌마"다. 그녀는 산 초입 양지 바른 곳에서 하루종일 입산하는 사람을지키고 서 있다.  "물 길으러 갔다 오는 거 맞지요?"  내 등에 매달린 배낭을 확인하며 그녀는 "장부"에 내 이름을 적을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다.  "하루종일 춥고 지겹지 않으세요?"  몇 번 마주치며 눈에 익은 뒤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50대 중반의 해녀인 그녀는요즘 바다에 일거리도 없고 몸이 아파 산불아줌마로 나섰다고 말했다. 일당 2만5천원의 노임, 그 마저도 두 사람이 교대로 근무하니 그야말로 입에 거미줄이나 안 치면 다행이다.  생활력을 잃은 남편을 대신해서 아이들의 학비며 생활비를 떠맡은 그녀는 최저생계비로 연명하고 있지만 자식들에 대한 희망 하나로 버틴다고 말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산불아줌마처럼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리고 있는 여성들이 많다. 공공근로는 물론 일당제 아르바이트, 각종 세일즈는 물론 3D 직종에까지 발벗고 나선 여성들을 보면 우리의 경제 현실이 얼마나 절박한지 실감난다. 보도에 의하면 최근 여성 노숙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사별이나 파산 혹은 실직 후유증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은 자식을 동반한 경우가 많아 쉼터를 마련해주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은퇴하기엔 너무 젊고 도전하기엔 늙은 세대- 4, 50대 중·장년들은 요즘 잠자리가편치 않다. 정년퇴직이 꿈이던 평범한 샐러리맨들은 현실을 직시한 지 오래다. 만약에 직장에서 잘리면 아내와 아이들은? 부모님은? 그래서 여성들도 재빨리 현실을간파하고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정 경제를 위해 몸 바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부작용으로 삐삐아줌마라는 독버섯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고속 성장의 막차에 올라타고 신나게 질주하다가 IMF라는 장애물을 만나 급전직하 추락한 세대, 이들에게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다. 부모님은 논밭 팔아서 공부 시켜주셨으니 살뜰히 모셔야 하고, 자식들에게는 고생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떠받들어야 한다. 누군가 이들을 "부모에게 순종하는 마직막 세대요, 자식들을 독재자로 모시는첫 세대"라 했다.  중장년층은 우리 사회의 척추에 해당한다. 자꾸만 허약해지는 척추를 여성들이 작은 힘을 모아 지탱하고 있다. 그 힘은 미약하나마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실의에 찬 남편을 위로하고, 자신의 희생으로 가정을 지켜나가는 여성. 그 힘이 한국 사회를 다시 일으킬 주역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비단 같은 머리채를 잘라서 자식들 공부시키던 그 옛날의 어머니들처럼 경제난국을맞은 오늘날의 여성들은 누구보다 강인하고 씩씩하다. 특히 중장년 여성들의 팔뚝은 누구보다 굵고 강하다.  산불아줌마! 힘 내세요. 당신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건강한 팔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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