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김자(金赭)

敎曰)으로 시작, 제문내용은 바로 그 다음(脩短之期)에서 시작. 기사및제문은 11째 행(慰九原之不昧)으로 끝난다.

조선실록 속 두번째 울산사람
1408년 과거시험인 초시 급제 첫등장
1412년 작황보고 감사로 두번째 등장

김자의 학문을 높이 평가한 세종
임금 세종에 직접 학문 강론했으며
대통령비서실 격인 승정원에 근무

군신과의 다툼속 직언한 김자
세종이 장려한 ‘격구’ 폐지론 제시
여색에 빠진 양녕대군 처벌 간언도

1428년 좌대언 신분으로 김자 사망
쌀·콩·종이 부의로 내리고 관곽 하사
세종, 제문서 애틋한 군신의 정 표해

김자(金赭)는 언양김씨로 위열공 김취려 장군의 후손이며, 벼슬이 정3품 좌대언에 이르렀다. 좌대언은 좌승지의 다른 이름이며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도승지 다음으로 높은 벼슬이다. 김자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408년(태종8) 3월12일 기사이다. 1차 과거시험인 초시(初試)에 급제하고 2차 과거시험도 통과한 김자 등 33인을 대상으로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복시(覆試)를 베풀었다는 내용이다.

그가 두 번 째로 실록에 기록된 것은 1412년(태종12)의 일이다, 그는 승정원의 정7품 주서(注書)였다. 황해도에 흉년이 들어 곡식이 상한 형편을 관찰사가 임금께 아뢰었다. 조세가 적게 걷힐 것을 염려한 임금이 김자를 파견하여 그 실상을 살피게 했다. 피해규모가 부풀려 보고된 것으로 드러났고, 황해도 감사 맹사성(孟思誠)과 10개 군의 수령이 모두 파직되었다. 당시 조정의 조세수입은 거의 모두가 농업에 의존했으니 지방수령의 작황 보고는 과세표준과 조세수입에 직결되었다. 따라서 조정은 작황 보고의 정확성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뒤 1416년(태종16) 김자는 육조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정5품 이조정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해에 김자는 문과 중시(重試)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직예문관으로 승진했다. 중시는 조선시대 현직 관리들에게 10년에 한번씩 보이는 과거인데, 이에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면 몇 계단을 뛰어넘은 수직 승진도 가능했던 것이다.

태종의 양위로 세종이 즉위했던 1418년. 그해 10월7일에는 임금으로서의 세종이 참석한 첫 경연(經筵)이 열렸다. 경연이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학문을 강론하던 자리를 말한다. 김자는 이날 세종께 『대학연의』를 강론한 신하 14명 중 하나였다. 그 해에 세종이 성균관에 처음으로 거둥한 때에 『홍범』의 강론에 참여한 신하 5명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만큼 세종은 김자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고 아꼈다. 김자는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422년(세종4)부터는 승정원에 근무했으며 이는 그가 사망한 1428년까지 이어졌다.

1425년(세종7)에 세종은 무과 과거시험에 격구(擊毬) 과목을 추가했다. 격구는 말을 타거나 뛰면서 공채로 공을 쳐서 구문(毬門) 즉 골에 집어넣는 놀이로서 고려시대에 특히 성행했다. 격구는 놀이를 통해 무예를 익힌다는 명분으로 장려되었으며 축국(蹴鞠)과 비슷하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축국은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차는 놀이”로 정의되니, 오늘날의 축구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격구는 공채를 사용하는 것이니, 축구보다는 오히려 하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김자는 “고려 말기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격구를 봄으로 인해 음란한 풍습이 있었습니다”라 하며 격구 폐지론에 동참했다. 세종은 “이 시대에 격구가 없다고 해서 음란한 여자가 없어지겠는가”라며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실록에는 태조가 직접 격구에 참여했으며 “격구하는 것을 사흘 동안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정종, 태종, 세종도 격구를 좋아하여 직접 참여했다. 김자는 격구를 놀이로 보고 폐지를 청했고 세종은 이를 무예로 생각하며 옹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예 아닌 놀이로서 축구의 인기가 높고 월드컵 경기가 세계경제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현대사회를 본다면 김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조선여인 유감동(兪甘同)의 사연은 조선 최대 스캔들 중 하나였다. 세종의 하문에 김자가 답했다. “간부(奸夫)는 이승, 황치신, 전수생, 김여달, 이돈 등과 같은 사람이고, 그 외에 몰래 간통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사오며, 본 남편은 지금 평강현감 최중기입니다. 최중기가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함께 갔는데, 이 여자가 병을 핑계하고 먼저 서울에 와서는 음란한 행실을 마구 하므로 최중기가 이를 버렸습니다. 그 아비는 검한성(檢漢城) 유귀수이니 모두 사족(士族)입니다.”

김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유감동의 형벌을 결정하는 회의를 의정부에서 열었다. 참석대상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육조판서, 삼군판부사(三軍判府事), 한성부 당상이었다. 죄상은 명백히 드러났으며 실록은 이날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사족(士族)의 딸로서 남편을 배반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여 스스로 관기(官妓)라 일컬으면서 사욕을 제멋대로 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며, 인륜을 문란시킴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마땅히 비상한 형벌에 처하여 뒷사람에게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유감동은 곤장을 맞고 노비가 되었으며 간통한 남자들은 참형, 곤장, 태형, 파직 등의 벌을 받았다.

세종이 형님인 양녕대군을 애틋이 생각하고 보호하려 노력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양녕이 노비 윤이(閏伊)와 사통한 일이 발각되어 세종이 이를 캐묻자 양녕은 오히려 화를 내었다. 1428년(세종10) 1월14일, 세종이 김자를 불러 의논하니 김자가 조용히 아뢰었다. “양녕이 태종께 죄를 얻어 밖으로 쫓겨나 거처하게 된 것은 오직 여색에 빠졌기 때문이온데 허물을 고치지 아니하고 이제 또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전하께서 우애가 돈독하시기 때문에 은혜를 받고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그의 상서에 ‘전하와 영원히 이별입니다’고 썼으니 그 말이 너무 심합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그 접대하는 예절을 엄하게 하여 사랑을 믿고 방자히 굴지 못하게 하소서.”

나흘 후인 1월18일에 김자가 세종께 정무를 아뢰려 하는데 고약해(高若海)가 성난 목소리로 저지하고 나서더니 양녕을 어서 처벌하도록 세종께 강청했다. 김종서 등 신하들도 한 목소리로 세종의 결단을 촉구했고 김자도 조용히 아뢰기를 “정부, 육조, 대간의 청은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 했다. 점잖은 세종이 여기서 평정심을 잃었던 것인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인의 교훈에 ‘세 번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벼슬을 버리고 가버린다’고 했으니, 그대들도 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그만둘 것이지 어찌 이다지도 말이 많은가.” 그러자 대간들이 모두 물러가서 사직하였다. 밀고 당기는 군신 간의 다툼이 그 뒤에도 이어졌으나 결국 세종은 양녕을 벌하지 않았고 양녕은 세종보다 12년이나 더 오래 살아 1462년(세조8)에 삶을 마쳤다.

김자는 1428년(세종10) 12월28일에 사망했다. 이 날의 실록 기사를 보자. ‘좌대언 김자가 죽으니 쌀 20석과 콩 10석, 종이 1백 권을 부의로 내리고 아울러 관곽(棺槨)을 하사했으며 또 치제하도록 명했다.’ 그로부터 약 1개월 후인 1429년(세종11) 1월25일, 예조좌랑 민후생이 세종의 제문을 받들고 상가에 이르렀다. 그 제문에서 세종은 다음과 같이 애틋한 군신의 정을 표했다.

▲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왕명의 출납을 미덥게 하여 나를 도움이 실로 많았으므로, 내 마음 속으로 가상히 여겨 권우(眷遇)를 곧 두텁게 하고, 앞날에 길이 이 내 몸을 도우리라 여겼더니, 어찌하여 병을 고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홀연히 부음이 뒤쫓아 들린단 말인가. 말이 여기에 미치매 마음의 슬픔을 견디기 어렵구나. 이에 예관에게 명하여 가서 술 한 잔을 드리게 하노라. 아아. 어진 신하가 이미 갔으니 홀연히 밝은 거울을 잃음을 슬퍼하며 휼전(恤典)으로써 구원(九原)의 혼령을 위로하노라.’

김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두번 째 울산사람이다. 최초의 울산사람 이예가 외교부 공무원으로 임금의 명을 받아 현해탄을 건너며 대일외교에 진력했다면 김자는 대통령비서실과 행정안전부 공무원으로 지근거리에서 임금을 섬겼다. 이예의 외교 공적이 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서 조망되었다면, 김자의 내치 헌신은 심금을 울리는 세종대왕의 제문으로 길이 남았다. 600년 전 중앙에 진출하여 태종·세종 대의 고위공무원으로서 국가를 위해 봉사했던 울산사람 김자의 족적은 오늘을 사는 울산 시민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될 것이다.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