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흙에서 났지만 더없이 청정한 연꽃. 정갈하고 넉넉한 잎, 고상하고 품격 있는 꽃, 은은하고 맑은 향기는 한여름 쨍쨍한 햇살 아래서도 고고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꽃 가운데 군자라고 하던가.    연 : 김은정作(33.4×45.5㎝ Watercolor on paper)

누군가의 말이 힘이 될때가 있다.
오늘이 그렇다.
폭염을 견디고 피어난 수련,
하나의 꽃을 피우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어려움도 모두 견뎌낸 이가
수련이 아니냐고,
그 수련 같은 딸이 곁에 있으니
더는 걱정 말라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의 산문집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를 읽은 후 불현듯 포도주 대신 오미자 냉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그래서 ‘유리 감옥 주홍빛 밀랍에 갇힌’(보들레르) 포도주를 한 병 땄습니다.’라는 글귀가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만든 오미자 엑기스는 며칠 전 연꽃 보러갔을 때 다 먹어 버렸다. 유리병에 갇힌 오래된 욕심과 열등감을 연밭에 모두 내려놓고 왔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냉장고 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다행히 냉장고 한 귀퉁이에 선물 받은 오미자 엑기스 한 병이 남아 있었다.

유리병 속 오미자 엑기스가 유난히 붉고 곱다. 청명한 공기와 태양 그리고 기름진 흙덩이의 영양분을 먹고 자란 오미자 나무들이 생각났다. 몸이 다쳐서 휴직을 하고 있다는 그의 얼굴도 달처럼 두둥실 떠오른다. 그의 깊은 마음이 담긴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명랑하고 평화로운 빛이 전해오는 듯 어서 먹고 건강한 여름이 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오미자 냉차는 유리잔에 얼음을 섞어 저은 후 약간의 잣을 띄워내면 좋다. 포도주처럼 취하지는 않지만 마시는 분위기는 비슷하다. 특유한 향이 코를 시원하게 한다. 여름 더위엔 이만한 차가 없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이들도 한 잔, 남편도 한 잔, 나도 한 잔. 다섯 가지 맛이 뒤섞여서일까. 뒷맛이 오묘하다.

오미자 열매에서는 짠맛, 단맛, 매운맛, 쓴맛, 신맛을 낸다고 해서 오미자라 한다. 오미자는 위장, 간, 신장, 심장, 폐 등의 건강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과하게 섭취하면 좋지 않다. 특히 위궤양을 앓을 땐 피하는 것이 좋다.

방금 마신 오미자 엑기스는 회사의 동료가 손수 만들어준 것이다. 지난 겨울에는 따뜻한 태양을 생각하며 마셨는데 오늘은 시원한 연밭을 생각하며 마셨다. 근래에 와서는 주위 분들에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한쪽 가슴이 무거워지면서 미안하다. 선물이란 그런 것이다. 서로 수평이 되지 못할 때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남편 역시도 요즘 들어 자존감이 낮아진다고 한다. 회사의 동료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데 모두가 살림이 넉넉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는 여태껏 뭐했을까? 퇴직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자책하는 말을 자주 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가 가장 마음이 아프다. 연밭에 묻어놓고 온 욕심이 되살아나는 듯 등에서 땀이 난다. “그동안 많이 베푸셨잖아요. 아이가 성년이 되었고 그 아이가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다면 성공한 거지요.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는 건강하잖아요.” 애써 위로를 한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는지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오늘밤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유례없는 폭염의 나날이다. 오직 흙이 양식이 되고 집이 되는 시골 마을 사람을 생각하면 이만한 더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단순한 마음이란 쉽지 않다. 나는 사계절 중 여름이 가장 힘들다. 해마다 불경기로 찾아온 여름이 두렵다. 여름만 되면 몸을 가누지 못해 자주 입원한 기억이 선명하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여름은 길지 않다.

사과는 빠르게 자라난다. 스스로 달릴 수 있는 꿈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비움의 높이에서. 청사과를 좋아한 딸아기가 비실비실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엄마, 미안해요. 제가 여름에 태어나서 미안해요.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은 정말 싫지만 연꽃과 수련을 너무너무 사랑해요.” 그리고는 이열치열이라 외치며 연신 애교를 부린다. 마치 하얀 수련 한 송이가 태양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때론 누군가 건넨 말이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오늘이 그렇다. 폭염을 견디고 피어난 수련을 보면 대단하지 않느냐고, 하나의 꽃을 피우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때의 어려움도 모두 견뎌낸 이가 수련이 아니냐고, 그 수련 같은 딸이 엄마 곁에 있으니 더는 걱정 말라는 것이다.

“나는 삼백 가지의 꿈을 꾸고, 이백아흔아홉 개는 버렸습니다. 끝내 이루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나를 만든 건 바로 기어코 이룬 한 개의 꿈이 아니라 그 이백아흔아홉 개의 덧없이 버려진 꿈이지요.” 장석주 시인의 글이 더 선명해지는 날이다.

▲ 이강하씨

■ 이강하씨는
·2010년 <시와세계> 등단
·시집 <화몽(花夢)> <붉은 첼로>·두레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수상

 

 

 

 

▲ 김은정씨

■ 김은정씨는
·남부워터칼라페스티벌
·6대광역시사생회교류전
·울산사생회·느티나무 회원
·울산수채화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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