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시간 헤쳐나가는 과정은
출구를 향해 나아가는 터널과 같아
빛을 향한 불굴의 의지가 그 해답

▲ 박기준 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밤잠을 설치게 하는 열대야로 모두가 고통스럽다. 그런데 개인이 처한 어려운 상황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전 한 야당 정치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수사를 앞둔 상황이었다. 약자 편에서 일하고, 정의를 부르짖던 평소 행적 때문인지 애석함을 표하는 여론이 많았다. 모방자살의 사회적 위험성에 대한 지적과 함께 처벌을 회피하는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경위야 어떻든 고통 속에서 쓰러져갔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법적 단죄를 받는 입장이 될 때 정신적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지식이나 수양의 정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르지 않다. 심연의 구렁텅이에 떨어졌다는 느낌이 들고, 족쇄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될 때, 평정심을 갖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언론에 의해 발가벗겨 질 때의 명예 추락, 자존감 붕괴 등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감내하기 어렵다.

최근 예기치 않는 일로 수사대상이 되어 곤경에 처한 고위직을 지낸 모 지인이 주변의 시선에 예민해지고 옥죄어 오는 책임 추궁에 대한 압박감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법적인 조언 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정신적 압박감에 더하여 후회, 원망, 자괴감 등이 뒤섞인 감정이 몰려오는 고통스러운 상황이 될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비참한 처지에서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보다 더 비참한 상황에 처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r)는 말하였다. 자신보다 더 기구한 운명이나 삶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리라.

어려운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는 것은 이를 극복하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시작일 수 있지 않을까.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순간에 실컷 절망하고 절망 속에서 해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슬픔을 위로하는 방법이 슬퍼할 수 있는 한 실컷 슬퍼하도록 하고 슬픔 속에서 답을 찾도록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나 실패 등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생기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받게 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한번쯤이라도 경험하지 않고 살아 갈 수만 있다면 정말 운 좋은 삶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고, 일들의 많은 결과가 운에 좌우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면 인생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어려움과 고통의 시간을 헤쳐 나가는 과정은 동굴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터널을 통과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둠의 동굴은 앞으로 나아가다가 자칫 미로에 갇혀 나올 수조차 없게 될 수도 있지만, 터널은 입구 반대쪽에 반드시 출구가 있어 계속 나아간다면 밝은 빛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운에 맡기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실낱같은 희망밖에 없더라도 최선의 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역경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 자신을 둘러싼 운의 요소가 변화한다고 하지 않는가.

채근담(菜根譚)에서 읽은 ‘쇠하여 쓸쓸하게 될 모습은 한창 왕성하여 충만한 가운데 있고, 앞으로 피어날 역량은 영락해 가는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변고를 당할 때면 백번이고 참는 마음을 굳게 지녀 성공을 도모해야 한다’는 구절을 떠올려본다. 꺾이지 않는 의지가 해답일 수 있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