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확실한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
진료현장도 불확실한 상황의 연속
증상 고려한 최선의 결정 내릴 뿐

대입제도개편 공론화 ‘설익은 감자’
책임만 미룬 꼴…신중한 검토 필요

고소·고발 유난히 많은 우리 사회
법으로 분쟁해결 안돼 갈등 커지고
차분한 논의·책임있는 결정도 사라져

오래전 해외연수 시절. 한밤중에 급한 전화가 왔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 어린 아들이 크게 다쳤는데 당장 응급실로 달려가야 되는지 봐달라는 부탁이다. 평소 장난이 심하던 녀석은 밤중에 침대에서 뛰다가 넘어져 이마에 커다란 혹이 생겼다. 울음은 그쳤지만 놀라고 야단맞아 잔뜩 겁먹은 표정이다. 사고 상황을 들어보고 신경학적 진찰을 해보니 이상은 없다. 의식 소실도 없었다. 뇌출혈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고 100% 장담할 수도 없다. 나는 다음과 같이 조언하였다.

“응급실에 가면 아마 뇌영상 검사를 할 겁니다. 응급실까지 찾아온 환자는 드문 위험에 대해서도 확인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뇌출혈의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그 위험이 어느 정도냐구요? 음. 솔직히 제 가족이라면 응급실에 가지 않고 지켜보겠습니다. 지연성 출혈 증상이 나타나는지만 살펴보면서요.” 이웃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이가 다음날에도 신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놓았다.

이런 결정은 부담스럽지만 진료 현장은 매번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단의 연속이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검사를 많이 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검사에 따르는 비용과 위험도 문제거니와 불확실성도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의사는 한정된 자원을 이용해서 중요 질환을 놓치지 않고 과잉 진료도 피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위해 근거중심의학이 강조된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일면 모순되는 연구결과들을 검토하여 신뢰할 만한 근거를 골라내고 환자의 증상과 상황을 고려하여 최선의 결정을 하는 것이다. 물론 환자의 신뢰는 기본이다.

정부도 ‘올바른 진단과 대책’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는 걸 보면 이처럼 근거 있는 결정이라 주장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근거 만들기나 남기기에 치중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대개 추진하는 정책에 유리한 자료만 발췌하고 지지자만 골라서 내세운다. 불신을 벗기 위해서라면 비용과 효과를 고려치 않고 탈탈 털어 조사하는 것이 능사다. 팽팽히 대립하는 사안은 결정 책임을 슬그머니 떠넘기기도 한다.

최근 대입제도개편 공론화 과정을 보자. 우리나라 대입 제도는 청년 취업난 등 사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단순히 교육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선안을 내놔도 부작용이 눈에 띄고 욕을 먹으니 오랫동안 공개적 논의도 회피해왔다. 오죽하면 올해 초에 교육부 차관이 몇몇 대학에 전화해서 비공개로 정시 확대를 요청했을까. 결정 시한이 임박하자 교육부는 하청에 재하청을 거쳐서 공론화위원회에 결정을 떠넘겼다. 혹시나 애매한 결정이 나올까봐 그랬는지 네 가지 안을 만들어서 하나를 골라달라고 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시민참여단이 그 중 하나의 손을 덥석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중대하고 복잡한 교육 정책을 논의도 근거자료도 불충분한 상태에서 2박3일 학습을 거쳐 결정하는 것은 무리였다. 마땅히 고를 만한 정답도 없었다. 뜨거운 감자인줄 알았는데 설익은 감자였다. 공론화위원회는 정시 확대 의견이 약간 많았지만 통계적으로 유의한 정도는 아니라고 밝히고 교육부에 다시 공을 넘겼다. 입시제도에 당장 큰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교육부는 다시 검토할 시간을 얻었다. 똑 부러진 결론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진단이 불확실하면 환자가 위급하지 않은 한 좀 더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문제를 방치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부는 논란이 많은 사안을 덮어두었다가 문제가 닥치면 그제야 급하게 정책과 법령을 만들곤 한다. 곧 드러날 부작용은 시행 유예로 막는다. 부쩍 늘어난 공직자에 대한 사법처리는 이러한 눈치 보기를 더 부추긴다. 요즘은 고위 공무원의 부패 척결을 넘어서 온갖 관행에도 규정과 사법의 칼날을 들이댄다. 어쨌든 잘못은 잘못이니까 일벌백계하면 관행이 바뀌지 않을까? 간단치 않다. 관행은 오히려 굳어지기도 한다.

병원의 대처 방법을 보자. 병원에는 크고 작은 사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감염, 투약 오류, 환자 오인, 낙상 등…. 병원은 관련자에 대한 강력한 징계가 오히려 사고 원인을 감추고 개선을 막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보다는 인력, 시설, 규정 등 시스템의 문제를 찾아내서 개선하는 것이 사고율을 낮추는 방법이다.

우리나라는 고소·고발이 유난히 많다. 일본보다 인구 대비 백배 이상이다. 생활형 검사를 자처하는 현직 부장검사 김웅은 올해 발간한 저서 <검사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법대로 하자는 말은 매우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도발이다. 법에 의한 분쟁 해결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기보다 새로운 분쟁과 갈등을 낳는 경우가 많다.”

민간인뿐 아니라 기관도 고소·고발을 남용하는 세태다. 정당은 선거 전후에 정략적으로 고소·고발과 취하를 반복한다. 정권의 의중이 실리거나 국민의 의혹과 분노를 받는 사건은 으레 고발과 수사로 이어진다. 구속과 처벌은 엄연히 다른데도 사건 피의자가 국민에게 밉보이면 검찰 등 기관은 반복해서 무리한 영장 청구를 한다. 정책이 국민감정에 영합하고 휘둘릴수록 거친 주장과 선동이 늘어나는 악순환에 빠지고, 차분한 논의와 책임 있는 결정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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