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아침이면 환한 햇살이 마구잡이로 드나드는 방이 있다. 그 방의 한 쪽 벽면 책장에는 내가 읽던 책들이 꽂혀 있는데 그 책들을 다시 읽으면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읽는 책처럼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책도 있고, 또 어떤 책은 들춰보면 밑줄이 쳐진 부분도 있다. 이렇게 유치한 부분에다 줄을 그었나? 우습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여전한 감동과 공감에 아! 하며 탄식이 절로 나오는 문장도 있다. 그러며 다시 그 문장의 의미를 곱씹어 보기도 한다. 아! 작가들의 고급지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다시 만나는 낯선 기쁨들이란. 한 동안 입지 않았던 옷 주머니에서 뜻하지 않게 고액의 지폐를 손에 넣게 되었을 때의 그런 기분처럼. 그 낯선 기쁨들을 몇 개만 소환해보기로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 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채호기의 ‘사랑은’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사랑의 시작과 끝을 이렇게 감쪽같이 표현하다니. 사랑은 왔다가 사랑은 간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단다.

스웨덴 출신의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오베라는 남자>라는 소설책에는 이 문장이 밑줄 쳐져 있었다. “누군가를 잃게 되면 정말 별난 것들이 그리워진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 미소, 잘 때 돌아눕는 방식, 심지어는 방을 새로 칠하는 것까지도.” 아. 어떻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상상만 해도 눈물이 벌써 차오른다.

“전 봄이라는 길손을 그렇게 이목구비가 훤한 거로 알고 있질 못해요. 늘상 그랬던 거 같은 데,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다가, 그 간절함이 다 지나고, 김 다 빠지고 나면 슬쩍 와 있는게 봄이거든요.” 김형수의 소설 <이발소에 두고 온 시>의 한 대목이다. 그래. 봄처럼, 인간이 기다리는 것들도 언제나 그 기다림을 잊었을 때 오는 건 아닌지.

책은 감정의 배달자이다. 우리가 때때로 느끼고 싶은 사랑, 슬픔, 기다림 등의 감정을 이렇게 공짜로 배달해준다. 어느 도시의 공공 도서관 로비에는 ‘짧은 글’과 ‘긴 글’ 버튼 중 원하는 버튼을 누르면 영수증 같은 종이에 문학 작품이 인쇄되어 나오는 문학 자판기가 설치돼 있다고 한다. 덧붙여 이런 생각. 그 날 자신이 누리고 싶은 감정을 담은 문장들을 읽을 수 있는 기능도 추가하면 어떨까 하는.

일본 작가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뜨거운 밥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고이치는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충동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읽고 싶다, 그 책을. 시간을 잊고 탐욕스럽게 책을 읽는 행복.” 아! 시간을 잊고 탐욕스럽게 책을 읽는 행복이라니. 그런 행복을 맛본 적이 있는가?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만 이런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어. 가끔씩 찾아오는 이런 즐거운 만남이 계속 책을 읽게 하는 힘이다. 그래도 어김없이 가을은 오고 있다. 책 애(愛) 빠져보시라. 책장 가득 머물러 있는 투명한 가을 햇살과 함께. ‘책 애(愛), 빠지다’는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이하는 2018 울산 학생 책 축제 슬로건이다.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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