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수 다담은갤러리 운영위원

처서(處暑)는 24절기 중 열네 번째 맞는 절기다. 올해는 8월23일이다. 이때부터는 모기도 입이 삐뚤어지고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공기가 나돌기 시작한다. 처서가 지나면 햇볕도 누그러지고 풀도 더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가정에서는 옷장에 넣어두었던 옷들을 말리기도 하며, 옛 선비들은 책장의 책들에게 햇빛을 보이는 행사를 했다고 한다. 그동안의 장마로 굽굽하게 젖었던 것들을 말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처서 이후에 비가 오면 논이 젖게 되고, 벼의 소출이 줄어 농민들은 가을비를 싫어했다. 처서 이후에는 나락이 영걸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부터 풀이 더 자라지 않아 논두렁이나 산소에 벌초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집안의 사정에 따라 추석을 중심으로 벌초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동안 타향에 살다가, 고향에 들렀을 때 조상묘소에 벌초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집안에서는 종친회를 중심으로 처서 이후의 날을 잡아서 대대적인 벌초행사를 거행한다. 대문중, 입향조 산소를 시작으로 중문중, 소문중 별로 벌초행사를 마치면 각 가정 조상의 묘까지 대개 2~3회에 걸쳐 실시된다. 종친회에서는 각 직장의 근무 일자를 제외한 공휴일에 날을 잡아서 통보를 하면, 문중 내 힘쓸만한 장정들이 각자가 가진 예초기를 들고 나와서 벌초행사에 참여한다. 근처에 살고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정해진 날이 되면 적극성을 가지고 참여한다. 이때가 되면 승용차 지붕에 예초기를 얹어서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처서를 기준으로 공휴일 고속도로가 붐비는 현상도 벌초행사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필자는 “이 세상에 안 계시는 조상 모시는 일에 그리 정성을 들이느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조상이 있었기에 내가 있고 나와 내 형제가 있다.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해 많은 외침을 받았다. 그 외침의 과정에서 가족이 목숨을 잃고 형제가 노예로 끌려가는 일을 당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군인이 아닌 의병대가 왜적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남자들이 내 가족 내 형제의 목숨과 안녕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의 혼란기 시절 왜적과 내통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한 무리도 있었으니, 누구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내 가족, 내 혈족 그리고 함께 사는 동향인(同鄕人)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상대였다.

어떤 집안에는 400여년 전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의병(아버지와 아들)들이 목숨을 잃었다. 학성동 충의사에는 그때에 목숨을 잃은 많은 분들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국란을 당했을 때 화합 단결하여 나라를 지킨 우리 조상들이 계셨기에 많은 자손들이 이 땅에서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즈음 세상은 지적우월성보다 상호관계와 협동성을 더욱 중요시 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 혼자 잘난 것보다 서로 공감하며 함께하는 정신> 즉 겸손과 배려가 더욱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회적 활동을 왕성히 하던 시절, 직장인과 거래자와의 관계유지를 위하여 문중 행사에 소홀한 경우도 있다. 문중 참여는 젊은 시절 큰일하며 높은 자리에(?) 있었던 친족보다, 어렸을 때부터 조부님 따라서 잔 심부름한 친족의 발언권이 센 것도 이 모임의 특징이다. 그 친족은 집안 행사의 분위기와 흐름을 오랫동안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1년에 3~4일 정도는 문중행사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장한다. 문중행사에 참여하면 집안 어른들과 안면도 익히게 된다. 그러면 나이가 들어도 일가들과의 서먹서먹함을 없앨 수 있다. 이런 봉사활동의 기회가 집안조상 산소에 합동으로 벌초하는 일이다. 우리 문중에서는 벌초군이 120여명이나 되며, 종친회소속 부인회에서 마련한 점심식사와 한 잔의 막걸리로 만남에 대한 반가움을 표하는 모습이 정겹기도 하다. 누구는 이런 말을 한다. <나이 들어 나를 반겨주는 곳은 일가뿐이더라.>박현수 다담은갤러리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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