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7일은 조선 신문고 최초 설치일
백성의 억울함 호소 마지막 수단
내달 울산시민신문고위원회 출범

▲ 김상육 울산광역시 감사관

동서고금을 통해 위정자가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는 일이란 권력을 부여해 준 국민에 대한 정(情)이자 예(禮)였고, 스스로 법(法)을 지키고자 하는 다짐이자 경쟁자를 견제하기 위한 술(術)이었다. 상경하여 손으로 북을 치던 북송 등문고와 조선 신문고, 귀족과 관료로부터 서민을 보호하던 로마공화정 호민관과 스웨덴 옴부즈만 모두 마찬가지다. 지금의 인터넷 청와대 국민청원과 국민신문고 포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선 태종 원년(1401년) 음력 7월18일(양력 8월27일). ‘등문고(登聞鼓)’를 설치했다. 태조 때부터 행대감찰(行臺監察)을 통해 지방관들을 살펴왔지만, 송 태조가 설치해 칭송을 받았다고 해 새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달을 넘겨 음력 8월1일에 신문고라 고쳐 불렀고, 해를 넘겨 음력 1월26일에는 정식 교서를 내렸다. 신문고는 백성들이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기 위해 기대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그런 신문고조차 치는 것을 막거나 조사를 잘못하여 파면된 의금부 관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후 성문 법전들이 정비되고, 백성을 위한 글자가 발명되면서 신문고의 역할은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치가 혼란스럽고, 관료사회가 혼탁해지고, 민생이 어려워지면 제도에 상관없이 백성들의 고충과 원성은 높아만 가는 법이다. 태종ㆍ세종대를 지나며 신문고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영ㆍ정조는 다시 창덕궁 진선문(進善門)과 경희궁 건명문(建明門)에 신문고를 달고 격쟁을 너그럽게 허용한 명군(明君)들이었다.

신문고의 모델은 중국이었다. 중국에서는 주(周)나라 이전부터 ‘노고(路鼓)’가 있었고, 위진시대 이후부터 등문고라 했다. 시대가 어수선하면 원통한 일은 더욱 많아지는 법. 중국 북송시대가 그랬다. 북송은 요나라와 서하와의 전쟁으로 백성은 죽어 나갔고, 세금은 치솟았다. 재정 개혁을 둘러싸고 신법당과 구법당이 치열하게 싸웠다.

‘수호전(水滸傳)’에서 보듯이 탐관오리가 늘었고, 도적의 길로 잘못 들어선 백성들이 따라 늘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황제들은 철권통치보다는 문치주의를 중시했고, 특별히 등문고원(登聞鼓院)을 설치해 운영했다. 그곳에서 근무하던 모방(毛滂)이라는 글 솜씨 좋던 관리는 등문고시(登聞鼓詩)를 지어 황제의 덕을 칭송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감회를 노래했다.

수백년이 지나 스웨덴에 옴부즈만(Ombudsman)이 나타났다. 북방의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불렸던 찰스 12세(Charles XII)가 러시아를 맞아 대북방전쟁(大北方戰爭, Great Northern War)을 하고 있을 때, 왕이 없는 사이 관료들이 권한을 남용하고 국민들에게 부당한 세금을 거둘까봐 1713년 도입한 제도이다. 지역을 감시해 모반이 발생하는 것을 막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로마공화정 호민관이 법 자체를 다투었다면, 옴부즈만은 행정작용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현대 국민주권 아래에서는 많은 민권 보호장치들이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비윤리적인 정치리더십, 부처 할거주의와 규제들, 현실에 뒤쳐지는 제도들 등 저마다의 이유로 국민들은 고충을 호소하고 있다. 나라를 가리지 않고 억울하게 죽은 부모나 자식은 여전이 나오고 있고, 그 원통함을 끝까지 풀지 못하는 일을 드물지 않게 뉴스를 통해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시대의 신문고는 어디 있는가?”하는 하소연이 나오는 것이다.

다음 달이면 울산시민신문고위원회가 출범한다. 상식을 가진 전문가들이 정치적 고려나 관료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월소(조선시대 소정의 소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헌부나 왕에게 호소하던 제도)를 하더라도 벌은 없고, 시민 곁에 늘 함께 있는 편리한 신문고를 우리 지역에 두게 되는 것이다. 신문고와 옴부즈만이 필요없는 시대가 올 때까지 요란하게 북을 치고 그에 맞춰 춤을 추자.

김상육 울산광역시 감사관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