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절기는 속일 수 없음인가. 바람은 어느새 가을을 품었고 가을을 품은 바람이 폭염에 지친 들판을 지난다. 흔들흔들 지날 때 마다 숨 가빴던 호흡들도 어느새 가지런히 고요함을 회복한다. 덕분에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 높아졌다. 이어질듯 멈추고 멈출 듯 이어지며. 분명 마디가 있고 멈춤이 있는 울음이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예견했음에도 멈춘다는 것은 멈추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음을 이들도 분명 알고 있기 때문일 터, 그래서 가을이면 이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더 애처로운 것이다.

인디언들은 길을 가다 넘어지면 ‘잠깐 멈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혹시라도 미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우리말에도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격언이 있다. 느낌(受)과 인식(想) 등 기타 정신 상태를 구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다. 영혼이 따라오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현실이 왜곡된다. 감정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감정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의 행동을 명령한다. 이것이 정동실재론(情動實在論)이다. 왜곡된 감정은 왜곡된 행동을 이끈다. 왜곡된 감정으로 괴로워하고 잘못된 행동으로 후회하다가 심지어 병을 얻기도 한다. 멈출 줄 모르면 누구 말처럼 한방에 ‘훅’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 텍사스주 베일러 의대 교수인 닥터 레이클(Robert E. Rakel·가정의학)은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 잠깐 멈출 것(止, pause)을 제안한다. 그래야 비로소 내면에 일어난 현상(presence)을 정확히 볼(觀) 수 있고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런 다음 나아가는 것이다(proceed). 이것이 바로 멈춤을 통한 자가 치료(self-treatment)의 기본 메커니즘(3P)이다. 지관겸수(止觀兼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 지와 관을 고르게 닦을 것을 강조한 불교의 수행법 하고도 통하는 대목이다.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멈출 줄 아는 사람이다. 멈춤(定)이 있어야 고요할 수 있고 그래야 비로소 볼(慧) 수 있다. 멈춤을 통해 스스로를 치료하며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나아가는 것이다. 멈춤이 없이는 어떤 것도 지속될 수 없다. 이 가을 풀벌레의 울음을 통해 배우는 멈춤의 역설이다.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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