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목 암각화박물관 관장·고고학 박사

루와-꾸우랑은 고고학과 민족학을 접목하여 현대선사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문헌기록이 없는 선사시대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족지가 열쇠가 된다고 믿었다.

1937년부터 아내 아리에트(Ariette)와 함께 2년간 일본 홋카이도에서 머물면서 아이누족(Ainu)을 조사했고 1945년 사회인류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의 지도를 받아 ‘북태평양의 고고학’이란 주제로 박사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논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한반도를 포함한 북태평양 연안의 선사시대 유물의 쓰임새와 성격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열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섬, 홋카이도(北海道). 19세기까지 일본인들은 아이누의 거주지라는 뜻으로 에조치(蝦夷地)라 했고, 아이누족은 아이누모시리(アイヌモシリ), 즉 인간들이 사는 땅이라 불렀다.

이때까지 아이누족은 어떤 국가체제나 봉건제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수렵채집 민족이었다. 아이누모시리는 겨울이 길고 눈이 많아 농사를 지을 수 없었지만 계절에 따라 연어가 회유하는 강과 곰

▲ 아이누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루와-꾸우랑. 출처=Ariette Leroi-Gourhan, Un Voyage Chez Les Ainous

과 사슴이 많은 숲, 바다에서 고래를 사냥할 수 있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기점으로 홋카이도로 명명되고 일본에 복속되면서 아이누족은 결국 멸족의 길을 걷게 된다.

아리에트 루와-꾸우랑이 지은 ‘1938년 아이누 여행, 홋카이도’는 벽안(碧眼)의 젊은 부부가 본 아이누족들의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당시 일본은 강력한 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고래사냥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루와-꾸우랑은 아이누족의 고래사냥을 조사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된 일도 있었다.

긴 겨울이 닥치기 전에 연어와 고래를 잡고 도토리를 저장하고, 사슴 같은 동물을 사냥하며 곰 제사를 지낸 아이누족의 삶은 묘하게도 반구대암각화를 남긴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상목 암각화박물관 관장·고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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