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기획경영팀 차장

지난 18세기까지의 예술은 종교 혹은 왕정과 귀족의 후원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가장 혁명적인 음악가라 불리는 베토벤도 귀족들의 절대적인 후원을 필요로 했고,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지역사회의 유력한 귀족으로서 그 영향력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19세기부터 기존체제의 붕괴가 가속화되며 예술 지원은 그간의 든든한 후원자들을 잃고 만다.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자본주의의 성장은 예술을 더욱 고립시켰다. 예술은 자본주의 논리로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 비효율의 극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후원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때 그 역할을 자처하는 대상이 나타난다. 바로 국가였다. 국가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이전과는 다른 보다 민족적이고 보다 국가적인 예술 지원체계를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국가의 역할 증가는 큰 문제점을 야기했다. 이전까지의 왕정과 귀족들은 주로 개인의 취향이나 명예를 위해 후원을 하는 경우가 상당수였지만 국가는 그렇지 않았다. 예술을 이념과 민족주의를 위한 선전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독일의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나치의 대표적 선전 기구였고, 스탈린은 예술을 민중들의 이념 강화에 이용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예술은 그 자체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대중의 선동과 유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다행이도 예술에 대한 억압은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조금씩 해소된다. 그리고 냉전이 시작되며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진다. 양 진영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경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이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여전히 국가마다 예술을 선전 도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그래도 그 순수성만큼은 존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되자 예술에 대한 투자는 길을 잃는다. 비교우위를 점할 경쟁상대가 없어진 것이다. 왕정시대처럼 특정인의 취향을 반영하기도 쉽지 않다. 예술 지원에 대한 목적이 상실돼 버렸다. 예술 지원에 목적성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부적절하나 현재는 오히려 목적이 없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한정된 예산을 두고 국가에 대한 예술가들의 의존도는 더 높아지게 된다.

예술 지원의 지향점 상실은 국가로 하여금 이를 비용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예술을 효과로 입증하려 한다. 이는 곧 간섭으로 이어져 예술행위를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따지기 시작했고, 예술가들은 점차 사업자로 변모하게 된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술 지원은 가치에 대한 투자다. 교육에 대한 투자와 엇비슷해 즉각적인 효과를 바라기 어렵다. 교육에 아무리 많은 예산을 투자해도 모든 구성원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예술 또한 그 결과를 예측하고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비대해진 국가의 역할은 어찌 보면 불가항력이다. 예술가들은 약자의 입장에 놓여있다. 이를 부정할 순 없다. 그래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방정부와 문화재단 또한 당연하다. 스스로의 권한과 역할을 충분히 자각하고 예술을 대해야 한다. 단순 행정지원이 아닌 예술이 가진 본질적 가치를 꿰뚫어야 한다. 예술을 비용으로 인식하는 순간, 단언컨대 예술의 역사는 돌이킬 수 없이 퇴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기획경영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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