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다시 올 수 없는 사람, 대신할 수 없는 목소리

 

매년 5월1일이면 비지스의 ‘First of May’를 듣듯이, 9월이 되면 되면 파바로티(사진)의 음성을 다시 듣는다. 파바로티는 2007년 9월6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올해로 11주년이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듣고 있는 노래는 빈센초 벨리니의 가곡 ‘방황하는 은빛 달’이다. “방황하는 은빛 달이여, 이 시냇물과 꽃들에게 말해주세요, 말해줘요, 사랑의 말을. 당신만이 나를 알고 있어요, 내 불타는 간구를. 그 만을, 그이만을 사랑해요. 헤아려보세요, 이 떨림과 이 한숨을…….”

나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음성으로 이 곡을 처음 들었다. 이후로 주세페 디 스테파노, 호세 카레라스, 체칠리아 바르톨리, 에바 메이 등 수많은 가수들의 버전으로도 들었다. 가장 멋진 궁합은 역시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에 비해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너무 까랑까랑하고 직선적이어서 이 노래의 정서와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의 기억이란 참 이상도하지. 생각이나 평가와는 다르게 첫 경험의 추억이란 게 존재해서 이 노래에 파바로티 목소리가 빠지면 왠지 섭섭해진다. 마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 유명한 1990년 로마 월드컵 무대에서 ‘쓰리 테너’ 공연을 한 이후부터 파바로티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다. 그 후 파바로티는 ‘파바로티와 친구들’ 시리즈, 하이드파크 콘서트, 센트럴파크 콘서트 등에서 수십만명의 청중을 모으는 대형공연에 주력했고 말년까지도 ‘고별 콘서트’의 이름으로 전 세계를 돌았다. 너무 상업적인 기획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던 팬들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러다가 2007년 9월 어느 날, 갑자기 파바로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 이제 우리는 파바로티가 없는 하늘 아래 살아야 하는구나. 이젠 그가 부르는 ‘그대의 찬 손’을 무대에서 들을 수 없구나. 돌아오라 소렌토로, 아무도 잠들지 못하리, 남몰래 흘리는 눈물도 떠나버렸구나…’ 하는 것을.

▲ 조희창 음악평론가

이건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취향이지만,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 하는 노래가 있다. 벨리니의 ‘정결한 여신’은 마리아 칼라스가 불러야 되고, 베토벤의 ‘아델라이데’는 프리츠 분덜리히가 불러야 된다. 그리고 푸치니의 ‘아무도 잠들지 못하리’는 파바로티가 불러야 한다. 다른 사람이 부르면 곧바로 ‘짝퉁’이 되어버린다. 그 곡은 그 목소리로 각인되어 있어 다른 목소리로는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연주자가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내가 사랑한 연주자들의 무대가 점점 귀하게 느껴진다. 얼마 전에 들은 백건우 선생의 베토벤 소나타가 그랬고, 정경화 선생의 프랑크 소나타가 그랬다. 이들과 한 시대를 살면서 세월과 음악의 변화를 같이 즐긴다는 것은 비할 수 없는 기쁨이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는 테너 유시 비욜링의 메트로폴리탄 공연을 본 그 날, 신문에 이렇게 썼다. “나중에 내 아이들에게 두고두고 얘기할 것입니다. 유시 비욜링의 기량이 최고이던 시절에 그의 목소리를 무대에서 들었다는 사실을.” 지금의 내 마음이 꼭 그와 같다. 위대한 음악의 사제들이여, 당신들과 동시대를 살아서 행복했습니다.

브라보 정경화, 포에버 파바로티!

조희창 음악평론가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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