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높다랗게 펼쳐진 푸른색 하늘이다. 그 아래로 향기(薰)처럼 송송 햇살이 내린다. 어디선가 한 무리의 가을바람이 지난다. 갈바람을 타고 점(點)이었던 햇살은 어느새 선(線)으로 변해 가을의 프리즘을 통과한다. 순간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한여름의 초록 너머로 붉고 노란 가을의 빛깔들이 어른거린다. 가을이 보여주는 갖가지 색채와 색조는 파장으로 경계 지워진 여러 종류의 빛을 우리의 뇌가 색깔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을은 프리즘을 통과한 빛을 바탕으로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낸 환상(幻想)의 공간이다. 이 환상의 공간은 올해도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그저 평범한 가을의 모습이다. 태양빛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평범한 것일수록 숭고해 보인다고 했다. 그것은 아마도 평범한 것은 열정이 아니라 평온함에서, 원망이 아니라 사랑에서 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으로 열매를 맺고 평온하게 고개 숙인 가을의 모습은 분명 숭고한 모습이다. 우리들 어머니처럼.

숭고한 가을의 공간사이로 한 무리의 생명들이 날아오른다. 눈부실 정도로 선명한 날갯짓이다. 들판을 보듬는 개울조차 빛을 발하며 흘러간다. 빛을 발하는 것이 어디 개울뿐이랴. 황금들녘, 보름달, 그리운 이, 보고 싶은 사람. 생명을 지탱하는 모든 삶들이 빛을 발하며 꿈틀 거린다. 온통 그리움의 빛이다.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서 “감정은 초기의 동물조상으로부터 오랜 세월동안 변하지 않은 채 인간에게 전수됐다”고 주장했다. 부드러운 가을의 태양이 나의 뉴런을 점화시켜 까마득한 나의 감정을 기억하게하고 나는 지금 그것을 지각하고 있는 것이다. 가을은 온통 그리움으로 피어난다. 그리움으로 출렁거린다. 그리움은 밀려오는 행복이다. 모두가 가을 양광이 주는 선물이다.

미국 신경과학 분야 최고의 권위자인 리사 F. 배럿 박사는 가능한 초목과 자연광이 많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망막에 부딪치는 ‘가을 양광’은 우리의 뉴런들을 차례대로 점화시켜 까마득한 기억을 되살리고 행복물질을 만들어낸다. 시인 박목월도 인간은 내면의 빛으로 산다고 했다. 가을속의 나는 지금 행복하다.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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