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기억에 바탕한 판단으로
단정할만큼 세상은 단순치 않아
시대변화에 맞는 미래가치 고민을

▲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경상도 지방에서는 아직도 아저씨보다 ‘아재’라는 말이 더 친근하고, 단어가 의미하는 세대 간의 상하관계 그 이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중년 이상의 세대들에게 아재라는 단어는 어릴 적의 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창고 같은 말이다. 팽이를 만들고 방패연을 솜씨 좋게 만들어 주던 사람이 바로 아재였다. 그러나 최근 이 정다운 말이 약간은 부정적인 느낌을 가진 뜻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아재 개그’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썰렁한 농담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철지난 기억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강하게 포함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시대의 변화를 앞장서서 만들어 가는 젊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이겠지만 나이든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부정확하고 타당성이 없는 그저 풍자적인 조어만은 아닌 것 같다.

아재로 불리는 나이가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어느 나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완결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게 된다. 모르는 것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소소한 인간사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문화를 넘어서 세계의 미래에 대한 문제까지도 서슴없는 의견을 가지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의 양이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기에 부족하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이 때쯤이면 새로운 지식이나 경험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세상의 일이 경험과 기억에 바탕을 둔 판단력만으로 쉽게 단정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면, 즉 아재의 나이에 이르면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보다는 지금까지의 기억과 경험을 강화하고 재편집하는데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낸다. 물론 새로운 상황에 대한 판단도 이 강화된 기억이나 경험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삶의 태도가 변화의 속도에 익숙한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재개그라는 말은 그 대표적인 표현일 뿐이다.

나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퇴직 후에도 사람을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래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자리를 만들고 또 참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두세 시간 동안 오가는 이야기는 거의 젊은 시절의 기억에 관한 것이거나 그 때 함께 했던 사람의 동정에 관한 것이다. 물론 사람들의 사교활동 주제가 너무 무거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억을 되살리고 편집하는 일보다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가는 일이 훨씬 더 필요한 일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흔히 100세 시대를 이야기 하지만 그 시간을 잘 버틸 수 있는 건강과 경제력만 있으면 모두 해결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어려운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보다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갈 후세들의 눈에 100세 시대의 풍경이 어떻게 보일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노인들의 1인당 의료비가 연평균 400만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 액수는 점점 늘어갈 것이 분명하다. 이 부담은 오롯이 젊은 후세들의 몫이다. 그러나 이 부담을 감당할 청년들은 취업을 포기하고 결혼을 포기한다. 인구 절벽이란 말이 신문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 자리는 거의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과 해결은 우리의 몫이 아니고 정부의 일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스럽다.

인간은 말로써 문제를 제기하고 말을 통해서 공공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찾아간다. 그래서 정치는 언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그러나 아재개그나 노인충이라는 말이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세대 간의 소통을 만들어 가는 말을 점점 잃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기억이나 경험은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장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래지향적인 공공의 가치를 만들어 가는 일에는 기억이나 경험보다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고민이나 이에 걸 맞는 담론을 만들어 가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영국 런던에는 ‘인생학교’라는 명칭의 골목학교가 많다고 한다. 강의 주제는 ‘혼자 시간 보내는 법’ ‘잠재력을 실현하는 법’ 같은 것이라고 한다. 독일의 동네 술집 ‘펍’에 모인 동네 아재들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같은 주제로 시간을 소비한다고 한다. 아마 여기에서는 젊은이들이 아재들을 만만히 보지는 않을 것 같다.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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