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과 울산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울주군 온산읍 화산리 산성(山城)마을. 산성마을은 마치 돗대처럼 고사된 채 서 있는 당수나무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 가는 나룻배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을 입구 당수나무에서 바라보면 온산국가산업단지의 즐비한 공장건물들 사이로 멀리 푸른 동해바다가 넘실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들어선다. 덕하시장을 지나 온산공단을 거쳐 덕신방면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LG화학 온산공장으로 가는 공단 이면도로가 나온다. 이 사잇길로 약 500여m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른쪽에 산기슭과 논이 만나는 곳에 옛 원강서원(圓岡書院)이 나타나지만 미리 찾을 생각을 갖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가 십상이다. 30여m를 더 내려가면 오른쪽에 중기대여 홍보판과 산성마을을 알리는 간판이 나온다. 겨우 승용차 한대가 다닐 정도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게 고사한 당수나무(해송)이다. 당수나무부터 시작되는 이곳 산성마을이 영월 엄씨(寧越嚴氏) 충의공파(忠毅公派) 울산문중(蔚山門中)의 가장 큰 집성촌이다.

 산성 엄씨라고 불리는 영월 엄씨의 울산문중은 불사이군과 충(忠)의 대표적 문중이다. 충으로 인해 엄청난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울산문중은 영월 엄씨 시조 엄임의(嚴林義)의 12세손인 단종 충신 충의공 엄흥도(嚴興道)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원강서원도 충의공을 모신 곳이다. 충의공은 서슬퍼린 세조초기 시해돼 영월 청룡포에 부유하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장본인이다. 당시 영월의 호장으로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뒤 화를 피해 멀리 영남의 한 귀퉁이인 울산(당시 언양현)에 자리를 잡고 몸을 낮췄다. 충의공은 울산으로 오기전 인근 두동면 봉계의 지근거리인 경북 경주에 잠시 거처를 정하기도 했다.

 충의공의 16세손인 울산문중 엄완영(71) 회장은 "복원되기 전에는 신분이 노출되는 것은 곧 멸문지화를 의미하는 것어서 신분을 속이고, 또 한 곳에 오래 자리를 잡지 않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완영옹은 "지금부터 200년전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하작에 묘를 쓰던 중 충의공의 5세손인 선(善) 할아버지의 지석이 발견되면서 400년전 삼동 둔기에 사신 것이 확인돼 충의공이 울산문중의 중시조이자 입향조"라고 설명했다.

 언양 금곡을 거쳐 중시조의 5세손인 선 할아버지가 삼동 둔기에 처음 자리를 잡았으며 6세손인 입(立) 할아버지때 이곳 산성으로 옮겨와 산성마을의 입향조가 됐다.

 400년전 불사이군의 충을 위해 거처를 누차 옮긴 선조들 못잖게 오늘의 후손들도 나라를 위해 정든 삶의 터전을 두고 떠났다. 일가들이 함께 모여살았던 온산읍 대정리는 물론 화산리 4개 마을 가운데 3개 마을이 온산공단에 편입, 70년대부터 지난 82년까지 근 10년동안 여러차례 이주를 당했다. 그나마 공단부지로 편입이 되지 않은 산성마을 일부가 남아있어 집성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공단 개발 이전까지만 해도 80가구를 훨씬 넘겼는데 지금은 40가구 정도가 고향을 지키고 있다. 공단에 땅을 내준 30여가구의 일가들은 인근 덕신에, 나머지는 울산시내로 옮겨갔다. 이주역사와 함께 1799년(정조 23년)에 대정리에 세워진 원강서원은 화산리 산성마을로, 다시 지난 98년에 삼동면 둔기리 하작으로 옮겨졌다. 이에 따라 지금은 매년 음력 9월18일 충의공의 제사는 삼동면 둔기리 서원에서 지내고 있다.

 산성이란 마을 이름은 지금은 많은 부분이 공단개발도 헐려 없어졌지만 토성이 있었기 때문. 충의공의 17세손 엄주순씨는 "공단개발당시 토성이 헐리면서 조선시대 포알들이 많이 나왔다"며 "문화재를 중히 여기는 요즘 같았으면 문화재 출토에 따라 공단으로 개발되지 않고 일가들이 그대로 함께 살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털어놨다.

 주일대사를 지낸 뒤 외무부장관을 두번이나 지낸 엄민영(嚴敏永·작고·16세손) 전 장관을 비롯해 조달청장과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지낸 엄일영(嚴鎰永) 전 청장, 엄구영(嚴九永·작고) 전 경남도의원, 엄신영(嚴愼永) 전 온양면장도 이 곳 산성마을 출신이다.

 특히 근대사에 들어와서 정계과 관계, 재계, 교계에서 영월엄씨 울산문중은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울산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뒤 현재 울주군정을 맡고 있는 엄창섭(嚴昌燮) 군수도 산성마을에서 자랐다. 부산시공무원연수원의 엄윤섭 원장, 해군대령으로 진해해군본부에 근무중인 엄상섭, 새마을문고 이사장을 지내며 막사이사이상 수상자인 엄대섭(작고), 의학박사로 개업의로 활동중인 대섭씨의 두 동생 봉섭, 용섭씨 등도 다 영월엄씨 울산문중의 일원들로 중시조인 충의공의 18세손들이다.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엄장섭씨,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엄현섭,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엄섭일씨도 마찬가지다.

 17세손들인 주(柱)자 항렬에는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엄주탁씨와 미생물 농학박사인 경북대 엄재열 교수, 울산중에서 교편을 잡았던 엄주대씨, 육군 소령으로 공학박사인 엄동환, 온산부면장을 지낸 엄주린씨, 울산시청의 엄주호(서기관), 엄주량, 엄주권(사무관), 엄재영, 엄주복씨 등 엄씨 성을 가진 울산시공무원 가운데 열에 아홉은 충의공의 후손들들이다. 또 북구지역에서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건설한 아진건설의 엄재목, 재석씨는 경북대 교수로 있는 재열씨의 동생들이다. 서찬수기자 sgija@ksilbo.co.kr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