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바라기나경숙作-환하고 편안한 얼굴이다. 태양이 내리쬐는 날이면 열정과 정열로 표정을 바꾼다. 해바라기라는 이름 탓인가. 갈망도 서려 있다. 감정을 가진 꽃이다.

노란색 해바라기 그림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잎은 없고 꽃만 크게 그린 그림이다. 꽃대 끝에 여러 개의 꽃이 머리 모양으로 모여 있는 형태의(두상꽃차례라는) 해바라기 그림도 있지만, 유독 태양처럼 뜨겁고 격정적인 그림에 점점 빠져든다.

해바라기는 나의 감정을 대변하는 영혼의 꽃이다. 어릴 적 외삼촌 집 텃밭에 심어진 노란 해바라기를 본 이후 해바라기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시원하게 뻗은 자태와 해를 향해 큰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열정적이면서 꾸밈이 없어 보여서 좋았다. 무엇보다 아주 멀리 내다볼 수 있을 것 같은 큰 키가 마음에 들었다.

외삼촌네 텃밭은 철마다 예쁜 꽃이 피어나는 꿈의 정원이었다. 동백꽃, 개나리꽃, 나팔꽃, 해바라기, 호박꽃, 코스모스까지 영혼을 살찌우는 놀이터였다. 늦여름에 피는 해바라기의 큰 얼굴을 내 얼굴 크기와 비교하면서 십년 후, 혹은 이십 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였다. 키가 큰 해바라기처럼 멀리 내다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텃밭의 해바라기를 보기 위해 잔심부름도 마다하지 않았다. 외삼촌네로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벼웠다. 어머니께서 가끔 약탕기에 약을 달이곤 하셨는데, 한약찌꺼기가 거름이 된다는 말을 듣고서 따로 모아두었다. 한약찌꺼기를 모았다가 텃밭에 뿌리면 온갖 꽃들이 싱싱하게 잘 자랄 것 같았다. 오빠와 언니, 동생 모두 한약찌꺼기를 들고 외삼촌 네에 가기를 꺼려했지만, 찌꺼기를 들고 텃밭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어린 나이에 또래와 다른 감성을 지녔다는 말을 들었다. 해바라기가 피는 계절에 눈 덮인 시골 할아버지 댁을 떠올리곤 했다. 이런 나를 두고 엉뚱하고 특이하다고들 하였다. 키가 큰 해바라기를 보면 일곱 살 때 처음 맞닥뜨린 폭설의 기억이 떠오른다. 밤새 소리 없이 눈이 내려 앞산과 뒷산이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맛보았다.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현실적으로는 너무 추워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지만, 마음은 산을 넘어 또 다른 세상 속에서 노닐었다.

도서관 앞에 심은 해바라기가 꽃문을 열고 그 큰 얼굴을 보여주었다. 어린아이처럼 도서관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자랑질을 했다. 해바라기가 피어있는 동안 기쁨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된다. (불멸의 그림,) 빈센트 반 고흐의 불멸의 그림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희망과 꿈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혹자는 반 고흐에게 노랑은 희망을 의미하며, 당시 그가 느꼈던 기쁨과 설렘을 반영하는 색이라고 했다. 대담하고 힘이 넘치는 붓질은 그의 내면의 뜨거운 열정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뜨거운 열정을 가진 그가 존경스러웠다.

바닷가 작은 도서관에 전시된 해바라기 그림에게서도 작가의 열정을 엿보게 된다.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색을 입히고 또 긁어내고 덧칠하고 붙이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면서 탄생한 작품이다. 보이는 것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느껴진다. 언뜻 평온해 보이기도 하는데, 많은 공정을 거쳐 완성된 격정의 작품이다. 평온한 그림 속에는 작가의 치열한 정신과 피나는 노력이 숨어 있다. 백조가 수면 위에서 평온해 보이는 이치와도 통한다.

도서관 앞 바람의 언덕에 작은 꽃밭을 만들었다. 두어 달 전에 지인에게서 해바라기 모종을 얻은 것이 계기가 되어 땅을 고르고 거름을 준 끝에 제법 그럴싸한 꽃밭이 되었다. 열기를 식힌다는 이유로 매일 물을 주고 있지만 내심은 꽃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텃밭을 수시로 들락거린다.

해바라기가 꽃을 피우려면 거름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큰 포대에 든 거름을 사서 꽃밭에 뿌렸다. 꽃밭의 면적에 비해 거름의 양이 너무 많아 부작용이 일어났다. 거름을 주기 전에 싱싱했던 모종이 축 늘어지기 시작하였다. 거름을 너무 많이 주었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거름의 냄새가 너무 나서 그냥 둘 수도 없었다. 흙을 사서 보충한 후 물을 주면서 거름과 희석시키고 나니 조금은 나아졌다. 과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해바라기 꽃을 피우려면 땀과 노력, 인내가 필요하다. 폭염에 해바라기 뿐 아니라 꽃밭에서 자라는 송엽국, 해국, 타래난초, 매발톱 등도 시름시름 앓았다. 매일 물을 주어서 열기를 식히고 있지만, 대책 없이 불어대는 바닷바람과 불가마 속과 같은 더위에 장사가 없는 듯했다. 피고지고를 반복하던 송엽국도 어느 순간 꽃이 피지 않고 꽃봉오리 상태로 머물러 있다. 해국도 꽃을 피울 기미를 내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여러 개의 해바라기가 꽃문을 열고 황홀한 색의 진수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 보던 해바라기가 이토록 산고를 겪고 난 뒤 당당하게 선 줄은 솔직히 몰랐다. 서서히 꽃문을 여는 해바라기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꽃밭에서 자라고 있는 해바라기를 보면서 작은 해바라기 그림을 한 점 구입했다. 내 마음을 빼앗은 격정적인 해바라기 그림은 다른 사람에게로 가서 비록 품을 수 없었지만 그 여운은 작은 그림 속에 강렬히 남아 있다.

▲ 고은희씨

■ 고은희씨는
·2005년 <문학공간> 등단
·수필집 <몽> <울산포구기행>·울산문학 ‘올해의 작품상’ 수상
·2017 문화의 날 울산시장상 수상
·문화쉼터 ‘몽돌’ 관장
·울산문인협회 이사
 

 

 

 

▲ 나경숙씨

■ 나경숙씨는
·대한민국 여성미술대전 특선·동상
·눈빛미술사생대회 특선
·대한민국 회화대전 특선
·개인전·회원전 다수
·울산미술협회·화우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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