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기박산성 임란의병

▲ 울산사람이 제일 정예롭고 용맹스럽다고 한 선조실록 내용.

임란 역사상 최초의 의병
선조실족엔 곽재우를 특정했지만
기박산성이 곽재우보다 하루 앞서
의병 결진과정 제월당실기에 기록

울산의 용맹함 조정에 알려져
1593년 9월16일 선조가 전교에서
“경주·울산병사 왜적 가장 잘 잡아”
10·12월에도 울산사람 용맹함 거론

못이룬 향현사 건립의 꿈
울산의병 기리는 사당 건립 요청차
1664년 울산 류극배진사 서울 파견
부정적 답변 받은채 귀향하다 익사

1592년 4월13일. 20만 왜군이 상륙해 다대포, 부산포, 동래포를 연이어 함락시켰다. 준비없이 당한 전쟁 앞에서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고을 수령은 도망하고 관군은 지리멸렬이었다. 당일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자. ‘2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양산, 청도, 밀양을 함락시킨 왜적은 4월17일 울산과 경주에 이르렀다. 신주와 위패를 선영의 분묘 아래에 묻은 울산 선비 7인(이경연, 이한남, 심환, 박응정, 고처겸, 박진남, 김응방)이 가솔을 끌어 모아 300명으로 의병의 진용을 갖추었다. 서둘러 군의 대오를 정비하자고 다짐했다.

4월23일, 소를 잡고 술을 마련해 기박산성에 제단을 설치했다. 의병의 출진을 하늘에 고유했다. ‘司命淸道’라 쓴 붉은 색의 대장기를 세우고, 그 주위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각 의병장을 나타내는 기를 세웠다. 또한, 동·서·남·북·중앙의 방위를 나타내는 다섯 개의 오방기(五方旗)를 설치했다. 또 대장단(大將壇) 아래에는 전설의 인물인 치우(蚩尤)를 그린 깃발을 세웠다. 이렇게 많은 기가 세워진 광경은 당시 울산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기박산성이 자리잡은 언덕배기를 기(旗)배기로 부르게 된 연유도 여기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자로는 기령(旗嶺)이다.

▲ 기령(旗嶺). 기박산성이 자리잡은 언덕배기 기(旗)배기.

여기서 ‘배기’는 고갯마루 즉 고개의 가장 높은 곳을 뜻한다. 언덕배기, 장승배기, 코빼기, 잔등빼기(잔등머리), 꼭두배기 등에서 용례가 발견된다. 같은 날, 의병장의 부서와 직책을 정했다: 박봉수(대장), 박응정(좌익장), 장희춘(우익장), 고처겸(좌위장), 이봉춘(우위장), 심환(찬획), 이한남(종사관), 이경연(운량호군), 박진남(좌제군), 김응방(우제군). 다음날, 서몽호(우장군), 전응충(우익장)이 합세했다. 합친 군세는 1000여 명이었고 군율이 엄격히 시행되었다. 며칠 후 견천지, 류정, 류백춘이 500명을 거느리고 경주로부터 와서 합류했다. 또한 100여명의 승군과 함께 신흥사의 지운 스님이 동참했다. 이와 같은 결진(結陣)의 과정은 이경연(운량호군)의 <제월당실기>에 기록돼 있다.

5월5일, 의병진은 야음을 틈타 병영의 왜적을 기습하여 대승했다. 수천 명의 왜적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수백 명이 죽었다. 의병진은 왜적이 점령하고 있던 병영을 탈환했다. 그러나 관군 없이 의병만으로 이를 지켜낼 수는 없었기에 다시 기박산성으로 돌아왔다. 첫 전투에서 승리한 기박산성 의병들은 정유재란이 끝나는 1598년까지 풍찬노숙하며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울산 일대(동대산, 무룡산, 정자, 병영, 반구동, 개운포, 온양읍)에서 주로 활동하며 때로는 경주, 영천, 문경, 군위, 대구까지 달려가 왜적을 무찔렀다. 특히 1597년 7월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끌었던 창녕 화왕산성 전투에도 참전했다. 이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관군 및 의병 장수 699명의 명단은 <화왕산성 동고록>에 기록되었다. 기박산성 의병 중에는 장희춘 이경연 전응충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3개월 간 화왕산에 머무르다가 그해 10월 기박산성으로 돌아왔다.

1597년 말에는 가등청정의 왜군이 지키던 울산왜성(도산성)을 명군, 관군, 의병 연합군이 공격했다. 소위 제1차 울산성 전투였다. 양측의 치열한 공방전이 열흘 이상 이어지고 피아간에 3만50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우물 없는 성에 포위된 왜군은 군마를 죽여 고기를 먹고 그 피를 마셨다. 관군과 함께 싸웠던 수많은 울산 의병이 이 전장에서 죽어갔다.

▲ 1872년 제작된 신흥산성도. 신흥산성은 기박산성의 다른 이름이다. 규장각 소장.

울산은 임란 최일선에서 국가를 지킨 간성이었다. 특히 울산 북구는 험준한 산세와 경주·영천과의 연계로 인해 울산 의병에 은신처를 제공했다. 울산은 부산에 이어 가장 먼저 왜적의 침입을 받았다. 정유재란의 끝자락에서도 왜적은 마지막까지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에서 버텼다. 그러니 전쟁의 참화를 울산은 오롯이 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임란 당시 이같은 울산 사람의 용맹함은 조정에도 알려졌다. 1593년 9월16일, 선조는 경상감사의 장계를 승정원에 내리면서 세 가지 사항을 전교했다. 그 하나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경주·울산의 병사가 왜적을 가장 잘 잡았다(慶州蔚山之兵最能捕賊)….’ 같은해 10월30일, 지방의 항전을 독려하기 위해 좌의정 윤두수를 파견하는 자리에서 임금은 또다시 다음과 같이 일렀다. ‘…경주·울산의 군사들은 다른 군사들보다 배나 용감하여(慶州蔚山之軍勇敢倍他)….’

그로부터 약 1개월 후인 12월3일, 임금이 윤두수를 불러 보고를 듣는 자리였다. “그곳의 장사 가운데 싸움에 능한 자가 있는가? 군정(軍情)은 어떠한가?”라고 임금이 물었다. 윤두수가 아뢰었다. “도원수의 말에 의하면 울산 사람들이 제일 정예롭고 용맹스럽다고 하였습니다(都元帥言蔚山人最精勇矣)” 이때 도원수는 권율 장군이었다.

길고 긴 전쟁이 끝난 지 66년이 되는 1664년,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을 거쳐 현종 치세였다. 울산의 선비 류극배 진사가 한강에서 익사했다. 울산 의병들을 기리는 향현사(鄕賢祠)의 건립을 임금께 주청 할 목적으로 서울에 갔다 귀향하는 길이었다. 울산 선비들의 상소문과 임금이 내린 답변을 뜻하는 비답(批答), 조정 중신들의 부정적인 심의 내용이 기록된 회계(回啓) 등 관련 서류도 모두 한강 깊숙이 가라앉았다. 총의를 모아 류극배 진사를 대표로 파견했던 울산 사회의 실망은 대단히 컸다. 이 비극적 사건으로, 뜨거웠던 향현사 건립은 일시에 사그라들었고 향현사는 끝내 울산에 지어지지 않았다.
 

▲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기박산성 의병은 ‘임란 역사상 최초의 의병’이라는 주장도 있다. <선조실록> 1592년(선조25) 6월28일 기사는 홍의장군 곽재우를 최초의 의병으로 특정하고 있다. “곽재우는 4월24일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토벌하였다…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最先起兵者)은 실제로는 곽재우이며…” 그러나 기박산성 의병 결진은 곽재우보다 하루 앞선 4월23일이었다.

그 의병들을 기념하는 사업이 매우 미진하다. 국가를 위해, 향토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던 선인들이 아닌가. 불과 420년 전의 일이다. 기박산성의 폐허에서 의병의 흔적은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대장단 등으로 비정되는 유구(遺構) 등이 아직 남아있다. 더 늦기 전에 산성의 윤곽이라도 실측할 필요가 절실하다. 그에 앞서 기박산성 의병들을 기념하는 충혼탑이라도 세워지면 좋겠다. 한강에서 익사했던 울산 사람 류극배 진사가 못다 이룬 향현사의 꿈에 동참하기 위해서라도.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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