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뚜사이’라고 부르는 개선문.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바친 라오스인들을 기리기 위한 독립기념탑이다. 그들을 식민 지배하던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해 시멘트를 들이부어 만들었다.

라오스의 옛정취 간직한 유적들
왓 시사껫사원·검은탑 탓담과 함께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뜬 바뚜사이는
수도 비엔티안을 대표하는 건축물들
공동체적 의미가 없는 랜드마크는
탐욕·수치의 기념물에 지나지 않아

은둔의 땅 라오스. 비행기 창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짙은 녹색으로 덮인 산악지대와 밀림이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작은 도시가 허연 버짐처럼 사람의 흔적을 드러낸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깊숙한 내륙에 땅 한 귀퉁이도 바다에 닿지 않고 강대국으로 포위되어 있으니 고립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육로는 너무 멀고, 메콩강은 물살이 세고 지형이 험하여 선교사들조차 접근을 꺼려할 정도였다. 밖으로 나가기도 어렵고 굳이 찾아갈 이유도 없으니 스스로 은둔의 땅이 되었으리라. 라오스에 대한 찬사는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일지도 모른다.

방콕이나 양곤처럼 비엔티안이 라오스의 수도가 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14세기 무렵 이 땅에 최초로 왕국을 건설했던 란창(Lan chang)왕국은 루앙프라방을 수도로 삼았다. 18세기 초 비엔티안 왕국이 분리되기까지 비엔티안은 남부지역의 한 지방 도시였다. 비엔티안이라는 도시 이름도 실은 프랑스인들이 식민지배시기에 부르던 이름이고, 원래는 ‘위앙 짱’이었다. ‘달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여행 작가 이상문은 ‘달도 반한 도시’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은 그 서정을 상상하기에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거리는 외국인 여행자의 시선을 끌만한 숙소와 음식점으로 태국의 카오산 로드를 방불케 하고, 야시장으로 개발된 강변은 점포들로 장벽을 둘렀다. 강은 도시와 격리되었다. 70년대 도시 외곽에서 흔히 보던 유원지 풍경이다. 싸구려 관광 상품과 장사치들의 호객,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팝송들이 ‘달도 부끄러워할 도시풍경’을 만들고 있다.

한가롭던 도시의 중심가로도 이제는 개발(?)되는 중이다. 맥락 없는 국제주의 현대건축들이 신흥자본의 위력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40년 전 우리 도시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애련한 향수라고 할까. 그나마 이 도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것은 사원들이다. 이들은 라오스가 불교국가이며, 비엔티안이 불교 도시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왓 시사껫(Wat sisaket)은 1818년 건립되었음에도 비엔티엔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 되어 버렸다. 샴군이 쳐들어와 모든 사원을 파괴했을 때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 사원이면서도 형식은 대단히 고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치 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외곽에는 다양한 형식의 탑들과 승방, 불상을 안치한 작은 전각들이 자리한다. 중심영역은 마치 궁궐의 내전처럼 회랑으로 감추어져 있다.

‘후기 라오 건축의 보석’이라 평가받는 이 사원이 살아남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불당 주변을 회랑으로 둘러싸는 형식은 방콕 왕궁의 에머랄드 사원과 유사하다. 회랑은 영역의 신성함을 고조시키는 껍질(layer)로서 영역의 안과 밖을 가른다. 소박한 회랑으로 둘러싼 폐쇄적 영역감이 은밀하고 중후한 느낌을 준다. 회랑 안에는 2단식 선반을 만들어 부처의 좌상을 안치했다.

불전이 동향이 아닌 남향을 하고 있다는 점, 또한 강의 흐름과 평행하지도 않다는 점은 이 사원이 불교적 전통이나 라오스식 전통과 다른 특징으로 알려진다. 건물 전체의 외곽에는 열주를 두어 마치 그리이스, 로마의 신전을 보는 듯하다. 기둥에 세로 홈을 둔 것도 서구 고전건축의 느낌을 표출한다. 툇간은 불전의 신성성을 다시 한 번 강화시킨다. 불전 중앙부의 지붕은 2층의 중층 지붕이며, 3단 맞배지붕으로서 툇간의 경사지붕을 뚫고 하늘로 치솟는다. 지나치게 거대하지도 화려하지 않지만 중후한 격식의 미학을 표출한다.

실상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은 따로 있다. 도시 한 가운데 버려진 듯 서있는 탓담(That dam)이라는 탑이다. 일명 ‘검은 탑’이라고 부르는 이 탑의 자세한 내력은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전설같은 설화가 전해질 뿐이다. 이 탑은 본래 황금 탑이었다고 한다. 시암 군이 침공하여 이 탑의 황금을 벗기려고 하자 탑 속에서 일곱 마리 뱀(naga)이 출현하여 물리쳤다는 것이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칠이 벗겨진 탑은 벽돌조의 속살을 드러낸다. 상상 속에서 황금빛 찬란했던 원래 모습을 유추해 보면 가히 라오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이었음에 분명하다. 팔각형의 기단부가 다층으로 구성된 것도 희귀한 형식이다. 기단 위의 체디는 종모양의 몸체가 늘씬하여 독특한 조형미가 돋보인다. 라오스인들의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 그들의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조형미, 강대국들의 약탈과 방화가 실증적으로 남아있는 역사성, 그것은 비엔티안이 어떤 도시인지를 말해주는 대표적 기념물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사의 랜드마크로 주목받는 기념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바뚜사이라고 부르는 개선문이다.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목숨을 바친 라오스인들을 기리기 위한 독립기념탑이다. 공항활주로를 건설하기 위해 원조 받은 시멘트를 들이부어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 형상은 그들을 식민 지배하던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했다. 디자인 의도도 건설방법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다.

오늘날 우리 도시에도 소위 랜드마크 조성사업이 일상적이다. 개발업자들은 한 층이라도 더 올리려는 욕심을 포장하기 위해, 기업들은 자신의 위상을 상징하기 위해, 정치가들은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해 랜드마크라는 표현으로 위장하곤 한다. 그 대부분은 공동체적 의미와 관련이 없는 사적 욕망의 상징물이다. 공동체적 의미가 없다면 랜드마크는 덩치 큰 쓰레기에 불과하다. 어쩌면 대대로 손가락질 받는 탐욕과 수치의 기념물이 될지도 모른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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