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등억리에 간월사지(澗月寺址)가 있다.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해 당시에는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법맥을 이어오다가 차츰 퇴락해 임진왜란 때에 왜병들에 의해 병화(兵火)돼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조 9년(1631년)에 명언(明彦)이 다시 중건했으나 조선말인 헌종 2년(1836년) 큰 흉년이 들어 농민운동과 연계돼 폐찰 됐다 한다. 그 후 노천에 방치돼 있던 석조여래좌상은 인체를 방불하게 하는 불신 등으로 8세기 말에서 9세기경의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낸 귀중함이 인정돼 울산지방에 현존하는 불상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됐고 이곳 사람들이 따로 암자를 지어 봉안하고 있다.
어느 날 오래 된 발라수(鉢羅樹 보리수나무)에 산새와 원숭이 무리들(大衆)이 모여들어 서로 자기가 장자(長者)임을 주장하는 큰 논쟁이 벌어졌다. 이 때 새가 나서서 말하기를, 나무는 새들이 열매를 따먹고 그 똥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새가 장자라고 뽐냈다. 이때 세찬 바람이 취령(鷲嶺 : 취서산)에서 불어 시냇물이 말하기를, 달이 훤하게 밝으니 새가 놀라서 시내 가운데서 울었느니라. 대저 달과 물이 생겨났음이 생(生)의 시초이거늘, 새가 어찌 제가 장자라고 싸울 수가 있으랴. 당시(唐詩)에 이르기를 "달이 뜨니 산새가 놀라 봄 시내 가운데서 울었도다" 했으니, 혹시 이로써 그 절 이름이 간월(磵月)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간월이 창조의 시초임에도 발라수 나무에 모여든 산새와 원숭이 무리들은 어리석은 장자논쟁을 벌였기에 보다 못한 간월사의 지령(地靈)이 통도사에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그리로 달아나버린 것은 아닐까.
마지막 폐찰 될 때까지 농민운동이라는 집단행동으로 인해 제세(濟世)의 빛을 끝내 보지 못하고 만 간월사. 그리고 마침내는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진수로 평가받고 특별히 모셔지긴 했으나 그 전까지 노상에 뒹굴었던 불상. 부흥과 멸망의 역사에서 그 갈림길은 언제나 자기만이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교만한 "새들"과 파괴를 능사로 아는 "전쟁", 그리고 생존을 내세우며 분별없이 해대는 "분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