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억리는 상남면에 속한 마을로 이조 정조(正祖) 때와 고종(高宗) 때에도 등억(登億)이라 했다. 일제시대에 등억과 신리로 갈라졌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다시 합해져 등억리라 했고 1928년에 상북면으로 편입됐다. 등억은 "등어리"라는 말에서 유래됐다고도 한다. 등(登)은 "높다" 내지 "오르다"라는 뜻을 가졌고, "어리"는 """이 음전한 것으로 본다면 "높고 광명한 마을"이 된다. 또 다른 하나는 "등(登) 어귀(口)"로 보는 견해이다. 어귀라는 말은 안(內)에 대응되는 말로써 어귀·어구라고도 하며 드나드는 목쟁이의 첫머리인 것이다. 따라서 등억은 오르는 어귀 또는 악(岳)의 어구에 있는 마을이 된다.

 이곳 등억리에 간월사지(澗月寺址)가 있다.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해 당시에는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법맥을 이어오다가 차츰 퇴락해 임진왜란 때에 왜병들에 의해 병화(兵火)돼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조 9년(1631년)에 명언(明彦)이 다시 중건했으나 조선말인 헌종 2년(1836년) 큰 흉년이 들어 농민운동과 연계돼 폐찰 됐다 한다. 그 후 노천에 방치돼 있던 석조여래좌상은 인체를 방불하게 하는 불신 등으로 8세기 말에서 9세기경의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낸 귀중함이 인정돼 울산지방에 현존하는 불상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됐고 이곳 사람들이 따로 암자를 지어 봉안하고 있다.

 어느 날 오래 된 발라수(鉢羅樹 보리수나무)에 산새와 원숭이 무리들(大衆)이 모여들어 서로 자기가 장자(長者)임을 주장하는 큰 논쟁이 벌어졌다. 이 때 새가 나서서 말하기를, 나무는 새들이 열매를 따먹고 그 똥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새가 장자라고 뽐냈다. 이때 세찬 바람이 취령(鷲嶺 : 취서산)에서 불어 시냇물이 말하기를, 달이 훤하게 밝으니 새가 놀라서 시내 가운데서 울었느니라. 대저 달과 물이 생겨났음이 생(生)의 시초이거늘, 새가 어찌 제가 장자라고 싸울 수가 있으랴. 당시(唐詩)에 이르기를 "달이 뜨니 산새가 놀라 봄 시내 가운데서 울었도다" 했으니, 혹시 이로써 그 절 이름이 간월(磵月)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간월이 창조의 시초임에도 발라수 나무에 모여든 산새와 원숭이 무리들은 어리석은 장자논쟁을 벌였기에 보다 못한 간월사의 지령(地靈)이 통도사에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그리로 달아나버린 것은 아닐까.

 마지막 폐찰 될 때까지 농민운동이라는 집단행동으로 인해 제세(濟世)의 빛을 끝내 보지 못하고 만 간월사. 그리고 마침내는 통일신라시대 불교미술의 진수로 평가받고 특별히 모셔지긴 했으나 그 전까지 노상에 뒹굴었던 불상. 부흥과 멸망의 역사에서 그 갈림길은 언제나 자기만이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교만한 "새들"과 파괴를 능사로 아는 "전쟁", 그리고 생존을 내세우며 분별없이 해대는 "분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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