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올해 고3 담임을 맡게 되었다. 수시 모집이 끝난 뒤의 2학기 고3 교실 풍경은 아, 어쩜 그리도 공부에 대한 미련들을 그렇게 싹 끊어 버리는지. 그렇다고 모든 학생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이맘 때 쯤, 나의 고3 시절을 떠올려 보면 쓸쓸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때 한 교실에는 60명 남짓한 반 친구들이 소복이 책상 앞에 앉아서 밤늦도록 책과 싸웠다. 드문드문 하늘에 떠있는 별도 한 번씩 올려다보면서, 꿈을 꾸며 삼삼오오 버스를 타고, 터벅터벅 골목길을 돌아서 귀가했다. 뭐,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우리가 거쳐야 될 인생의 한 부분이라 생각했다.)

우연히 영화 ‘고산자 김정호’를 본 적이 있다. 어렸을 적에 동네 산에 올라가 지형 살피는 것을 좋아했던 김정호는 마을 서당의 훈장에게 한 장의 고을 지도를 우연히 얻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실제 지형과 지도를 비교하던 중 지도가 너무 많이 다른 것을 알고 이때부터 지도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게 된다. 청년이 되어서까지 지도를 만들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은 김정호였으나 나이든 부모님을 대신해 낮에는 농사일을, 밤에는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는 것 외에는 뜻을 펼칠 수 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뜻밖의 인연이 찾아오며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결국 잡게 된다. 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백두산만 수십 번 올랐다고도 한다. 조정과 양반이 독점하고 있는 지도를 백성들의 삶을 풍요하게 만드는 지도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이상을 품은 그였다. 또한 옛 산을 닮고 거기에 기대어 살고 싶어 했던 고산자(古山子)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길을 통해서만 다른 곳으로 간다. 그에게 있어서 대동여지도 제작은 자신의 삶의 여정 하나씩을 지도 위에 남기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살아가는 것은 갈등의 연속이다. 선택의 순간이면 매번 망설여진다. 무얼 먹나? 어디를 가야하나? 뭘 해야 할까?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올까 두렵고, 그래서 내내 후회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나마 낫다는 것을 선택한다 하여도 언젠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남게 될 것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는 이런 내레이션이 있다. “사람은 가까이 있는 꿈에 만족해야한다. 멀리 있는 것에 욕심 내봤자 힘들고 속만 쓰릴 뿐이니까. 공허한 열정은 가슴앓이만 남을 뿐이니까.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짓이 짝사랑이다. 그래도 그 미련한 짝사랑이 해볼 만한 이유는 그 열정이 아주 가끔은 큰 기적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멀리멀리 돌아 이루어지기도 하며 설령 이루지 못한다더라도 그 꿈 근처에 머물며 행복해질 기회를 주기도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를 버티게 하는 것은 작은 행복이 아닐지도 모른다. 절망조차 무력하게 만드는 힘, 오늘, 우리들 마음속에 웅크린 미련을 한번 쯤 불러 보는 건 어떨는지. 새로운 삶은 미련을 끊을 때 시작되기도 하지만 그 한 가닥이라도 남아 있던 미련이 끝내 희망으로 바뀌고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부딪치고 깨지고 다시 도전하고 실패하고, ‘실패해도 상관없어. 다시 도전하면 되니까’라는 마음으로. 미련은 희망을 낳는다. 미련은 희망의 이음동의어.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온다.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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