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광춘 동의과학대 겸임교수 전 이수화학 상무

울산에는 다른 도시에 비해 공장 돌리는 사람들이 많고 정유공장과 석유화학단지, 식량부족에서 벗어나게 해준 비료공장, ‘하면된다’는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준 조선소와 자동차공장을 비롯해 많은공장들이 돌아간다. 88올림픽 즈음 공장에서 교대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전통으로 이어지는 생활이 있었다. 지금은 재개발로 그때의 흔적들이 거의 없어졌지만 사람들의 기억에는 남아 있다.

모닝 근무를 마치면 교동 목살골목 연탄불 위에서 고소하게 구워진 목살에 소주한잔으로 피로를 풀었고, 이브닝 근무 후 동료나 다른 회사에서 퇴근하는 친구들을 만나 구방송국앞 움막같은 주막 석굴암에서 등받이 없는 동그란 의자에 앉아 파전에 막걸리 한잔하면서 고향이야기로 타향에서의 향수를 달랬다. 꼬박 밤을 새는 나이트 근무 후 출출한 속은 중앙시장 골목 판잣집 2층 숙이식당에서 새벽에 들어온 싱싱한 활어와 매운탕에 반주를 얹어 시간가는줄 모르고 먹다 술에 취해 나와서는 저녁인줄알고 다방에 갔다가 욕만 실컷 얻어먹고 쫓겨났던 기억도 있다.

그 시절에는 신용카드 가맹점이 적어 외상이 참 많았다. 외상 영수증에도 나름의 신용등급이 있었는데 명함에 금액을 적어 주면 1등급, 영수증에 사인을 해주면 2등급, 장부에 기록만 하면 3등급쯤 됐다. 외상값은 다음달 월급날 대부분은 갚고 또 새로운 외상을 달아놓고 나왔다. 월급날 회사정문에 외상값 받으러온 사람을 피해 뒷문으로 나가는 선배들을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공장 돌리는 사람들의 긍지와 자부심은 대단했다. 공장을 돌린다는 것은 단순히 돌아가는 기계를 점검하고 관리하는 차원이 아니다. 기계는 사람과 함께 숨을 쉬고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가족과도 같다. 돌다가 힘들면 힘들다 투정도 부리고 신나면 같이 즐거워하면서 경쾌하게 노래를 부른다.

가족들의 공장방문의 날, 한 직원부인이 공장안에 사람도 없고 기계만 돌아가는데 직원들은 무엇을 하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한참 생각하다 웃으면서 “기계들 하고 잘있나, 어디 아픈데는 없나, 혹시 쉬고 싶지는 않나” 이런 인사도 하고, “잘 돌아주어 고맙다”는 이야기도 하면서 온공장을 둘러 보고 있다고 하니 부인이 다시 물었다. 기계가 어떻게 말을 하냐고? 나는 부인께 되물었다. “기계도 말을 합니다. 기계에 달려있는 여러 종류의 계측기기로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고 돌아갈 때 나는 소리로 말을 하고, 몹시 힘들때는 막 흔들면서 빨리 쉬게 해달라고도 한다”라고 설명하니 한참을 생각한 후 말의 의도를 이해하는듯 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공장과 운명공동체가 되어 밖에 나와 있는 동안에도 혹시 올지 모를 연락을 받기위해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하고 잠잘 때도 항상 베개 옆에 두고 연락이 오면 반사적으로 옷을 입고 군대 5분대기조처럼 움직인다. 공장으로 들어가면서 동료들이 다치지 않길 내내 기도하며 도착하면 함께 땀으로 범벅이 되어 공장을 안정시킨다. 사람들은 왜그렇게 온몸에 불이 붙은듯 뛰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단순한 책임감보다 운명공동체로 살고 있는 사명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동료중 한사람이라도 실수를 하는 순간 톱니바퀴 같이 물려 돌아가는 공장은 가동을 멈추고 수많은 위험과 손실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공장을 돌리는 사람들은 어떤 실수도 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경주지진 때 동료들과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꼭 몸이 쟁반위에 올려져 비틀거리며 도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정신없이 차를 몰고 공장에 들어가 문제 없음을 확인하고 동료들과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던 때를 생각하면, 지진에도 문제없고 어떤 비상사태에도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물려주지 못한 아쉬움이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지만, 사람들의 안전의식이 향상되고 시설 또한 지속적으로 보완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에서 참 다행이라 느낀다. 울산에서 공장을 돌리면서 사는게 참 재미있었다. 선배들이 그랬고 내가 그랬듯 지금 공장 돌리는 사람들도 먼훗날 울산에서 공장 돌리는 재미가 참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바란다.

고광춘 동의과학대 겸임교수 전 이수화학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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