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감정 저장하는 유일한 동물
감정 줄이기 위해 많은 말 만들며
다가오는 미래 쌓아갈 준비도 필요

▲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마음에 담아 두지 마라.” 철이 들 무렵부터 참 많이 들어 온 말이고 살면서 수없이 되뇌인 말이다. 지난 일들을 너무 오래 기억 속에 담아 두면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도 그 기억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한 마디 말은 성경이나 불경 또는 탈무드 같은 책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이 짧은 경구는 어려운 문자가 아니라 이웃 동네 어른들의 입으로부터 이어져 온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간단한 지혜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어릴 적에 겪은 아픈 기억은 평생을 간직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성장기의 고통이나 결핍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성인이 되어도 잘 없어지지 않고 생활 속의 장애로 드러난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여기까지 이르지는 않더라도 대부분 한두 가지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 가장 흔한 것이 젊은 시절의 사랑과 헤어짐에 관한 것이다. 강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이 아픔과 무관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이러한 상처는 깊이 감추어두고 드러내어 표현하지는 않는다. 유행가 가락이나 술잔의 힘을 빌려 가끔씩 마음속에 떠올리더라도 오래 간직하지 않는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가 아직도 노래방에서 불리는 최고의 레퍼토리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때의 상처는 아픔만이 아니라 때로는 메마른 삶을 어루만지는 힘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최근 언론에서 보도되는 일들을 보면 사랑이나 이별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 격렬하고 직설적이어서 혼돈스럽다. 상처나 분노를 마음속에서 정리하고 갈무리하기 보다는 지금 바로 현실에서 행동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이 가져다 준 상처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또 사랑했던 연인의 가족까지 해체하고야 마는 무서운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분노와 좌절에 시달리는 사람의 마음 속 풍경을 다 들여다 볼 수는 없으나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이 격렬한 감정을 기억 속에 저장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래서 인류는 마음에 두어진 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줄이기 위해 많은 말들을 만들어 왔다. 가장 오랜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내가 아는 한 선배는 SNS 화면 속 자신의 사진 아래 한동안 이 말을 적어 놓고 있었다. 친구 같은 딸을 예기치 않은 사고로 보낸 후 몹시 힘들어 하던 시기였다. 매일 보면서 자신을 위무할 한마디의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휴대폰 속에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된 지혜가 적혀있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오래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연 속에서 말을 달린 인디언도 이러한 말로 자신을 경계했다. “마음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다.” 생각이나 마음은 한번 일어나면 화살과 같이 멈추지 않고 스스로의 궤적을 가진다는 뜻이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디언들은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인간은 마음이 괴로울 때 쉽게 떠올리는 금언 한마디는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 같다.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반야심경의 문구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읊조리는 것처럼 말이다. 살다보면 자신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그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견디어 낸다. 이것을 도와주는 것이 그 사회가 간직하고 있는 지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다르게 바뀌고 있다. 개인의 감정과 욕구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최고의 사실이요, 진실이라고 가르친다. TV 광고 속에서는 하루 종일 이러한 말들을 쏟아내며 욕구를 현실에서 바로 실현하라고 시청자들을 유혹한다. 인간의 마음에 관한 오래된 금언들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다보니 누구도 이러한 지혜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한다. 동네에서 들어온 오래된 말들은 이미 사라졌다는 뜻이다. 광고 속의 상품으로 인간의 마음을 다 채우지는 못한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무엇인가 필요할 것이다.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진술, 즉 간단한 문장 하나가 그것일 수도 있다. 김상곤 전 울산시 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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