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민관식作 : ‘고향’이란 단어는 무심코 설렌다. 산과 들로 둘러싸여 사계절이 뚜렷한 내 고향. 알싸한 가을이 완연히 내려 앉았지만 회색빛 도시와는 달리 언제나 푸근하다.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고 싶은 고향의 땅이다.

밤나무 아래는 속이 빈 밤송이와 벌레 먹은 밤톨만 어지럽다. 나뭇가지 한쪽에 간짓대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고, 밤송이는 아직 채 마르지 않았다. 남이 먼저 다녀간 줄 알았더라면 일곱 남매가 바쁜 시간 쪼개가며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빈 자루로 돌아가려니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

고향 마을 뒷산이 밤나무밭이 된 것은 내가 결혼을 하고 난 칠십 년 대였다.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의 장정들은 ‘밤나무는 쌀나무’라는 정부의 장려정책에 따라 빈 땅 곳곳에다 밤나무를 심었다.

몇 년 되지 않아 마을 뒷산은 밤나무로 우거졌다. 곡물 못잖게 전분 함량이 높은 알밤은 도회로 팔려나가 빵이나 과자의 보조 재료가 되어 식량 절약에 한몫을 거들었다. 마을 어른들 주머니도 그득해졌다. 아마도 그때가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풍요를 누렸던 시절이었지 싶다.

문제는 세월 앞에 깊어지는 사람들의 나이였다. 농사일을 두려워 않던 장년의 농부들은 늙고 병들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승길에 올랐다. 아버지 역시 수년 전에 뒷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겼다. 너도나도 돈을 좇아 도회로 떠난 젊은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마을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끊어진 지 오래였다.

당연히 마을에는 농사일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어졌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람은 줄고 알밤 빠진 밤송이 같은 빈집이 늘어났다. 오십 년 전에는 삼백 명을 헤아리던 마을 인구가 지금은 여덟 명만 남았다. 그조차도 팔순이 가깝거나 팔순을 넘긴 노인들이니 머지않아 마을은 텅 빌지도 모른다.

고향마을에 들어섰을 때, 개미의 숨소리가 들릴 것 같은 적막에 놀라고, 사람의 자취가 드문 것에 아연했다. 개 짖는 소리, 꼬꼬닭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긴, 집에서 가까운 논밭 부치기도 힘이 달리는 노인들이 무슨 수로 짐승 수발을 들겠는가.

한때는 이 마을에도 사람들의 웃음소리, 동구 밖으로 놀러 간 아이를 부르는 어미의 소리가 왁자했다. 고샅을 뛰어다니는 개구쟁이의 발걸음들 소리도 요란했다. 하루 일을 끝내고 어둠이 내리면 마을 청년들은 동산에 올라 별빛을 조명 삼아 목이 터지도록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였을까. 당시의 농부들은 수확한 농작물을 난들에 쌓아두고도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래도 손을 타지 않았다.

요즘은 낯선 외지인이 나타나 마을을 어슬렁거리면 행여 농작물에 눈독을 들일까 봐 마음을 놓지 못한다. 한해 전인가, 밤사이 돈 되는 농작물을 몽땅 도둑맞은 사건이 있었다. 차까지 동원하여 알뜰히도 거둬갔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마을에서는 어정버정 돌아다니는 낯선 이가 보이면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살핀다고 했다.

애면글면 지은 농사를 탐하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산골짝에 잇닿은 논밭의 작물은 멧돼지나 고라니가 임자다. 꼬부라진 허리로 뼈 빠지게 가꾼 농사가 하룻밤 불청객에 난장판이 되고 만다. 젊은 농군이라면 울타리를 쳐 짐승들의 습격을 막을 수도 있으련만 연로한 농부들이야 줄을 매어 깡통이나 두어 개 다는 게 고작이다. 깡통이 울린다 한들 멧돼지나 고라니가 눈이나 깜짝하겠는가!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여덟 명 어른 중에 성한 분이 없다. 성치 않은 몸으로 힘들여 지은 농사를, 일손이 모자라 제때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시에서 둥지를 틀고 사는 자식들이 애써 시간 내어 달려와 보지만, 오래도록 농사일을 잊고 산 어줍은 손으로는 썩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저희 먹을 양만을 취해갈 뿐이다.

시골이 공동화되는 건 속도전에 가깝다. 그나마 기계농이 손쉬운 곳은 귀농할 사람의 눈도장이라도 받지만, 입지조건이 나쁜 고향 마을은 귀촌하려는 사람에게도 외면당한다. 그뿐이 아니다. 일손이 미치지 않아서, 농기계가 닿지 않아서 진즉에 풀숲이 된 논밭이 수두룩하다. 아버지 떠난 우리 집 밤 농장 역시 먼저 보고 먼저 챙기는 사람이 임자가 되었다.

“주인이 손 놓은 밤, 주워간들 어떠리.” 하면서도 막상 빈 밤송이들만 너부러진 광경과 마주하니 속이 홀랑 뒤집어진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앙앙불락한 마음이 되는 건 어찌할 수 없다.

“남의 것을 무슨 심보로 싹쓸이를 해갔을까.”

못마땅한 심사를 한마디씩 추렴해보지만, 우리의 성토는 여기까지다. 털어가든 주워가든 도시에 사는 우리가 비어가는 시골을 지켜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 박동조씨

■ 박동조씨는
·수필세계 신인상
·천강문학 대상
·농협전국주부글짓기 대상
·시흥문학상, 동서커피문학상 수상
·2014 젊은수필 20인에 선정
·작품집 <거미> 출간
·한국문인협회, 울산문인협회 회원
·수필세계작가회, 에세이울산문학회 회원

 

 

▲ 민관식씨

■ 민관식씨는
·개인전(부산·울산)
·우리만남전(대전)
·예형회 회원전(서울)
·숲과 물 자연전(광주)
·한국미술평론지 선정 작가전(서울)
·남부현대미술제(울산 마산 부산 창원)
·한국미협 회원·미사랑작가회 회원
·다형미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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