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당연한 것이 이상한 것으로, 이상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이상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거나 법과 제도를 무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요즘 산업현장에서 논란을 빚고 있는 "무노동 무임금"(No Work, No Pay)에 대한 갑론을박이다. 무노동 무임금을 말하기 위해서는 "파업"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언론의 지적처럼 "파업공화국"답게 올해도 어김없이(?) 이곳저곳에서 파업이 발생하고 있다. 예년과 달리 올해는 파업이 여름에 집중되는 바람에-물론 여기에는 민노총과 한노총의 프로그램이 작용했다-춘투 대신 ‘하투’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춘투든 하투든 "투(鬪)" 즉, "투쟁"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상대를 일단 "적(敵)"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투쟁은 반드시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언필칭 "노사는 운명공동체"라고 하면서 "임단협"을 "임단투"로 바꿔 부르는 이율배반적인 용어부터 빨리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이 옆으로 샜다. 결론적으로 말해 "무노동 무임금"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관계법에도 이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87년의 6·29선언 이후 봇물처럼 터진 노사분규시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진 예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 따로, 현실 따로인 것이다. 우리 노조가(특히 대기업) 그만큼 힘이 세거나, 아니면 사용자측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노조 집행부나 조합원이 파업을 손쉽게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파업을 해도 손해볼 게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잠시 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다 노조의 힘이 세다는 독일조차도 조합원의 75%가 찬성을 해야 파업을 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는 절반만 찬성해도 파업이 가능한 것도 "손쉬운 파업"을 부추기는 원인이다.

 공산품은 1년만 지나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제품이 나오는데 우리의 노사관계, 그 중에서도 무노동 무임금 관련 법규정은 아직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으니 정말 의아스럽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선진국에선 "손해를 각오하고" 하는 마지막 수단이 파업인데 반해, 우리는 마치 연례행사처럼 치르고 있는 것은 바로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조합원들이 파업 찬성에 가볍게 표를 던지는 것도 집행부가 알아서 책임져 주겠지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기업이 천재지변이 아닌 인위적인 사태로 생산활동을 중단했을 경우 입게 될 피해는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컷 피해를 입혀놓고 "내 월급을 보전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염치없는 일이 아닌가!

 더욱이 무분규로 협상을 끝낸 기업보다 더 많은 급여인상과 일시금을 요구하는 현상은 어느 나라에서도 그 예를 찾기 힘든 희한한 논리다. 만약 이런 요구가 계속 받아들여진다면 어느 노조가 파업을 하지 않겠는가? 놀고 돈 받는 일을 마다하는 것은 성인군자도 외면하기 힘든 유혹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정착시키지 않으면 파업 없는 노사문화는 요원할 뿐이다. 생산·판매손실을 입은 데다 파업임금마저 보전해야 하는 이중손해를 강요하는 "無노동 有임금"은 우리의 노사관행에서 가장 먼저 불식시켜야 할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다. 기업은 논 팔아 장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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