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선임기자
11월이 되면 항아리만한 호박이 돌담에 매달려 있는 풍경이 이채롭다. 여름 덤불 속에서 누렇게 익어간 늙은 호박이 입동을 하루 남겨놓고 모든 베일을 벗어버렸다. 오로지 알몸뚱이 하나, 이마저 된서리를 맞게되면 조만간 ‘담 밑에 호박 떨어지는 소리’가 필자의 등억마을 돌담밑을 울릴 것이다.

호박은 ‘뒤로 호박씨 깐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 ‘남의 호박에 말뚝 박기’ ‘얼굴은 호박같이 생겨도 마음씨는 곱다’는 등의 오명에 시달린다. 죄도 없는데 가장 더러운 씨앗으로 치부되고, 변소 지붕에서 큰다고 제사상에도 올라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호박은 흥부에게 금은보화를 가져다 주었고, 신데렐라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차를 안겨줬다.

모든 것들이 다 그렇듯이 ‘진국’은 늙은 것들에게서 나온다. 늙은 호박에 풍부하게 들어있는 노란색의 베타카로틴은 노화의 주범인 활성산소를 없애는 보배같은 존재다. 또 속을 편하게 해주고, 산후 부기를 제거하는 탁월한 효능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암세포를 억제하고 면역력을 높여준다.

호박(琥珀)은 5000만년 전 송진이 굳어서 된 보석을 말한다. 비싼 보석(호박)을 몸에 걸치는 것보다 늙은 호박을 잘 요리해서 먹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길이다.

특히 남몰래 ‘뒤로 깐다’는 호박씨는 <지구상의 150가지 건강 음식>의 저자인 조니 보든 박사가 적극 추천한 ‘몸에 좋지만 잘 먹지 않는 11가지 건강식’의 하나다.

호박씨는 손으로 까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남 몰래 한움큼 입에 털어 넣고 넘겨버리기도 하지만 껍질의 대부분이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똥으로 나온다. ‘뒤로 호박씨 깐다’는 말은 호박씨를 손으로 까지 않고 ‘뒤’로 깐다’는 뜻이다. 아무리 은밀하게 호박씨를 먹어도 똥을 보면 금방 탄로난다는 조상의 ‘호박씨 이론’에 찬탄을 금할 길 없다.

호박은 사실 천대받을 식물이 아니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성은 ‘호박’같은 큰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박’씨 성을 갖게 됐다고 한다(정민,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그러고 보면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나’ 같은 표현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일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인들을 ‘불타는 도서관’이라고 표현한다. 늙은 호박의 늙은 지혜가 유난히 빛나는 가을이다. 이재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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