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문화민주주의와 공동체

오늘날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과거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의 급격한 추진에 따른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회 안전망의 구실을 공동체가 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 있다. 18세기 산업혁명은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이때 농촌공동체에서 이주한 초기 노동자들은 공동체에서 분리된 자신의 삶이 너무나 불안하였기 때문에 그들만의 공동체를 꾸리고자 했다.

심리학자 김태영은 ‘우리 사회에서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것은 배고픔이 아니라 무시당하는 고통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는 ‘무시가 상위 1%로부터 당하는 수직적 무시 보다는 하위 99%에 속하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수평적 무시가 더 고통스럽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1%의 갑질에 분노하지만 이러한 일은 일상에서 거의 겪지 않는다. 대신에 홈플러스 직원이나 아파트 경비에게 하는 갑질처럼, 서로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에게서 당하는 무시는 일상이 되었다.

수평적 무시는 직업으로 평가를 받게 되는 가족 간에서도 일어난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해체는 신자유주의의 승자독식과 무한 경쟁체제 때문에 강화된다.

그런데 지금은 자본에서 공동체를 강조하고 나섰다. 하지만 한번 붕괴된 공동체를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물론 현장에서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공동체 형성을 위해 서툴지만 스스로 회의도 열고, 마을축제도 만들고, 마을자랑과 문제에 대한 고민도 한다. 생전 처음 해보는 정산이지만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물어물어 해결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있다.

반면에 도시 재생이나 아트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지기도 한다. 건물주의 이해관계 때문에 과거에는 연탄차가 다닐 수 있던 길이 지금은 자전거조차 다닐 수 없는 좁아진 곳이 있는가 하면, 도시재생사업에서 구획정리에 포함된 자신의 땅은 공시지가 이상에 팔려고 하고, 남의 땅은 공동체를 위해 공시지가 이하로 팔라고 요청하는 이상한 사례도 등장한다. 서울 종로구 서촌마을의 ‘궁중족발’ 사건은 그 중에 하나다. 아무리 ‘내로남불’이라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억압은 사람들에게 방어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극심한 경쟁에 내몰리는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문화현상이다.

문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는 것이다. 오늘날 공동체 운동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것은 참여와 협력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의존적이고 경쟁적인 문화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울산시 남구 삼호동처럼 주민편의시설을 단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더디 가더라도 주민들이 필요한 것을, 주민들이 직접 설계하고 만들게 하는 지혜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공급자가 주민들보다 강하면 주민들의 ‘필요’는 ‘교육된 필요’가 될 수도 있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문화가 소수의 똑똑한 사람들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창조적 결과’라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떠 올리면 좋겠다.이강민 울산미학연구소 봄 대표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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