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②

▲ 메콩강의 지류인 쏭강은 말이 강이지 조금 큰 시냇물에 불과하다. 여행자들은 강변에 놓인 평상이나 원두막 정자 위에서 나른하고 따분한 시간을 즐긴다.

쏭강, 멈춘듯 흐르는 강물처럼
평화로움 즐기는 이들 모이는 곳
이윤추구 목적 아래 성냥갑 건물들과
시끄러운 레포츠 상품들이 차지
느리되 견실한 삶의 가치관이
높게 평가받는 사회로 나아가야

방비엥은 라오스를 소개하는 대부분의 여행 자료에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장소이다. 카르스트 지형으로 형성된 독특한 산봉우리, 그 연봉들을 휘감고 있는 안개, 휘돌아 나가는 강줄기와 토속적인 원두막까지 환상적인 장면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제목에는 ‘지상의 마지막 유토피아’, ‘배낭여행자의 천국’, ‘시간이 멈춘 곳’, ‘순수의 나라’ 등등 역마살을 부추기는 표현이 사용되곤 한다.

방비엥으로 가는 버스표는 비엔티안의 어느 호텔에서나 구할 수 있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고 호텔로 데리러 온다니 이렇게 편리할 수가 없다. 하지만 버스 여행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다. 30분전부터 나와 기다리는데 30분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는다. 호텔직원에게 물어봐도 “곧 올테니 걱정 말라”는 대답만 반복한다. 무엇을 기다리고, 언제 출발할 것인지, 알려주는 사람도 물어보는 사람도 없다. 우여곡절 끝에 버스는 예정보다 2시간이나 늦게 출발했지만 아무런 해명도 사과도 들을 수 없었다.

실상 2시간 빨리 갔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았을 터 공연히 분통이 터진 것은 내가 이들의 시계에 맞추지 못한 탓이다. 이들의 시계는 수 백 년간 살아온 환경과 방식에 맞추어져 있다. 국토의 80%가 산악, 구릉, 고원지대이고 농경지가 3%에 불과한 척박한 땅. 덥고 습한 열대 몬순 기후, 게다가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 살아온 역사들은 서둘러봐야 달라질 것이 없는 생태환경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들의 표정과 태도에서 읽혀지는 것은 ‘순수’가 아니라, 어쩌면 ‘체념’일지 모른다.

요란한 명성과 달리 방비엥은 작은 시골마을이다. 인구가 1000명도 안 되는 면소재지에 불과하다. 그나마 건물들은 강변을 따라 제방처럼 집중되어 있다. 화보에 등장하는 절경은 강변으로 나가야 만날 수 있다. 쏭강은 강변의 열대수림과 산자락을 품어 장대한 풍경화를 그려낸다. 하지만 계림의 산수를 구경한 사람에게는 흥분할 만큼의 절경은 아니다.

기묘하게 구불거리는 산봉우리들을 빼면 우리네 시골의 강변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변의 시설들도 시선을 끌만큼 특이하지 않다. 초가지붕의 원두막들, 통나무로 얼기설기 꿰어 놓은 다리들, 대나무로 엮은 외벽과 발갛게 녹슨 양철지붕의 집 들, 속을 드러낸 초라한 살림살이…. 50여년 전쯤 우리 동네의 모습을 회생시킨다.

강변의 양쪽 풍경은 너무 대조적이다. 도시 쪽 강가에는 관광시설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빈틈없이 들어찬 건물들은 강을 조망할 수 있는 손바닥만 한 틈새도 허용하지 않는다. 저마다 조망을 자본으로 하는 욕심들이 도시와 강을 철저하게 가로막고 있다. 건축형식 또한 주변 환경은 아랑곳하지 않는 성냥갑형태의 소위 국제주의 건축들이다. 오로지 이윤추구라는 목표에 충실함으로써 명승지를 허름한 근대도시로 바꾸었다.

여행자의 대부분은 쏭강으로 모인다. 메콩강의 지류인 쏭강은 말이 강이지 조금 큰 시냇물에 불과하다. 폭이 넓지도 않고, 수심이 깊지도 않고, 유속이 빠르지도 않다. 탁월하게 물빛이 곱거나 맑지도 않고, 뛰어나게 아름다운 모래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 책가방 던져 놓고 물장구치던 동네 시냇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하기에 자연스럽고, 친숙하다.

여기서는 멈춘 듯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도 천천히 흘러간다. 여행자들은 강변에 놓인 평상이나 원두막 정자 위에서 나른하고 따분한 시간을 즐긴다. 굳이 고급스러운 장치가 필요하랴. 건축가들은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개성적인 작품을 만들도록 훈련 받는다. 그들은 소위 대가들의 탁월한 선례를 찾아 분석하고 배우려 노력하는 만큼 인간의 행위와 감성에 대해 공부하지는 않는다. 좋은 건축이란 보기에 좋은 것 이전에, 그것이 세워질 환경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적합해야 한다.

지나친 건축적 장치가 때론 행위를 제한하는 법이다.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거나, 책을 읽거나, 멍 때리거나, 시원한 맥주를 찔끔거리거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려면 그늘진 평상 하나면 족하다. 아이들을 대나무로 엮은 어설픈 뗏목으로도 톰 소야가 될 수 있다. 오리 배 따위의 유치한 도구는 풍경마저 망치게 된다. 그 잔잔한 평화로움이 천국을 만든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이 평화로움을 깨는 것은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한국인들이다. 한국 여행사들은 쏭강을 수상 레포츠 장소로 선전하고 상품화한다. 카약이나 튜빙, 심지어 모터보트 타기가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물살도 세지 않고, 폭도 좁은 시냇물에서 즐기기에는 너무 부적절한 종목이다. 해병대 상륙 훈련하듯 구호를 외치며 노를 젓는 카약들, 폭주족처럼 요란한 굉음을 내며 물살을 가르는 모터보트들이 조용한 천국에 흙탕물을 끼얹는다. 뭔가 움직이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인식하는 한국인의 다이나미즘(dynamism)이 아닌가.

‘빨리 빨리’라는 말이 세계 백과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한국인의 시계는 유난히 빠르다. 일도 빨리하고, 먹는 것도 빠르고, 노는 것도 빠르다. 집을 짓는 것도 빠르지만, 지은 집을 허무는 것도 빠르다. 쉬는 것도 전투적이어야 한다. 속도는 자본주의 시대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남보다 앞서기 위한 자본이며 능력이었으리라.

빨리 성장하면 부실하게 마련이다. 서구인들이 성당하나 짓는데 수백 년씩 걸렸던 이유는 기술이 모자라거나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제는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느리되 견실한 삶의 가치관이 높게 평가받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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