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국회의원 폭로로 백일하에 드러난
사립유치원 비리에 전국민적 공분

비리 온상으로 내몰린 유치원들
사적소유와 공공성 경계 정리 안돼
관련법등 미비로 적발된 경우 많아
공공성 담보할 제도적 장치 외면
혼란 방치해온 정부·국회 책임 커

분노여론 편승해 구원자 자처보다
토론과 설득 통한 대책 마련나서야

올해 10월 국정감사에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3년 이후 지금까지 17개 시도에서 감사에 적발된 유치원 명단’을 공개했다. 특히 유치원 교비로 명품 핸드백이나 성인용품을 구매했다는 등 구체적 내용이 드러나자 국민들은 놀라고 분노했다. 그런 비리를 저지른 곳에 순진한 자녀를 맡겼다니, 몸서리가 처진다. 적발 건수는 전국 1878개 사립유치원에서 5951건. 기관 당 3.2건이나 된다. 거의 모든 유치원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처럼 보인다. 마음이 안 놓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근처 유치원에 자녀를 보내려던 부모는 일부 유치원이 휴업하거나 폐원한다는 소식에 또다시 마음을 졸인다.

학부모들은 당장 청와대 청원을 수십 건 올렸고, 정부와 여당은 즉시 화답했다. 교육부 장관은 사립유치원의 일방적 폐원을 불허하고, 비리에 무관용 원칙으로 대처한다고 하였다. 교육부는 각 시·도교육청 홈페이지에 유치원 비리 신고를 받는 섹션을 개설하였고, 국민권익위도 따로 최대 보상금 30억 원을 내걸고 신고를 받고 있다. 지자체마다 도로변 LED 알림판에 “어린이집·유치원 부패·공익침해 집중 신고 안내 전화번호”라는 문구를 게시하였다. 전가의 보도인 세무조사도 등장했다. 국민의 분노와 정부의 서슬에 놀란 유치원 단체는 우범집단 취급에도 꼼짝 못하고 물러났다. 박용진 의원은 유치원 비리 근절 등을 위한 소위 ‘3법 개정안’을 재빨리 대표 발의하고 민주당 의원 129명이 모두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려서 국회통과를 재촉하고 있다.

일단 유치원 공백 위기를 넘긴 것 같은데 어째 느낌이 편치 않다. 정부의 대책을 가만히 보면 이런 셈이다. ‘유치원 회계 관련 비리가 만연하고 심각한데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앞으로 투명하게 감시하고, 신고 받으며,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엄하게 처벌하겠다. 하지만 사립유치원이 전체 원생의 약 75%를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비리가 있다고 함부로 퇴출시킬 순 없다. 오히려 이런 제재를 못 견뎌서 폐원을 원하더라도 반드시 학부모 3분의 2 이상의 동의서를 받아야 하도록 지침을 개정해서 억지로라도 계속 일하도록 하겠다.’

여기에서 중요한 의문이 든다. 유치원 교육이 자동화 공장이 아닐진대 감시하고 억누르는 분위기에서 성심껏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정부는 모든 유치원에 비리가 있다고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유치원을 비리의 온상으로 여기게끔 몰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드는 의문.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들만 모여서 유치원 운영자가 되고 비리를 저질렀다는 건 이상하다. 그보다는 제도가 미비하거나 혼란스러워 유치원마다 서너 건씩 감사에 걸렸으리라는 추정이 합리적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도 있다. 그간 대부분의 감사 적발 사항은 주의나 경고에 해당되었다. 유치원 회계 지출 업무가 소홀하거나 부적정하여 보전되기도 했지만, 간혹 고발되더라도 횡령죄로 처벌된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다. 제도적으로 미비하여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 7월에 대법원은 어린이집 보육료 지원금은 수혜 대상이 학부모이므로 일단 결제되면 원장의 사적 소유가 된다는 취지로 판결하였다. 지금까지 사립유치원에서 사적 소유와 공공성의 경계가 정리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제도가 미비하더라도 비리는 처벌하고 부정은 바로잡아야 한다. 늦었지만 관련 법규도 정비해야 한다. 하지만 재정 지원 없이 학원처럼 운영하던 사립유치원이 2012년 누리과정 도입 후에 매년 2조원의 예산을 지원받게 된 뒤에도 공공성을 강화할 제도를 만들지 않고 혼란을 방치해온 잘못을 정부와 국회는 먼저 인정하고 겸허히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 정부와 여당은 이제야 실태를 알아낸 듯이 말하지만, 지난해 2월에도 정부는 거의 같은 내용의 유치원 비리를 발표하였다. “사적인 선물 구입, 친인척 해외 여행경비, 노래방·유흥주점 등에서 기관 운영비를 개인 쌈짓돈처럼 사용….” 다른 점이라면 이번엔 실제 유치원 명단이 공개되었다는 것. 자신의 아이가 비리 유치원에 다니는 것을 알게 된 부모들은 분노하여 여론이 들끓었고, 정부와 여당은 구원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때론 비등한 여론이 세상을 개혁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토론과 설득보다도 매번 사건과 폭로에 따른 분노의 불길에 편승하는 건 비겁하다.

교육부는 대입제도처럼 국민들의 의견이 팽팽할 때는 결정 책임을 하청에 떠넘기더니, 방치해오던 사립유치원 비리가 국민의 공분을 사자 금방 단호한 태도로 변했다. 정치인들은 선악의 대결구도를 만들어 여론몰이에 능하다. 개인이나 집단을 악의 무리로 만들고는 변명할 틈새도 막아버린다. 성난 여론을 등에 업고 오버하는 것이다.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인다. 잘못했으면 반성해야지 무슨 제도를 탓하냐며 면박을 준다. 심지어 총리의 조심스런 발언도 예외가 아니다. 총리가 예결위에서 ‘사립유치원의 공공성 측면과 사유재산의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하자 박용진 의원은 지금 유치원 사유재산 말할 때냐고 반박했다. 이렇게 말도 못 꺼내게 하는 분위기에서 당사자의 의견 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법 개정을 밀어붙인다면 또 다른 논란을 낳지 않겠는가.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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