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논설위원

필자는 어렸을 적부터 왼손잡이라서 곤욕을 치렀다. 밥상머리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왼손으로 들었다가는 경을 쳤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상을 물리고 나면 슬그머니 국그릇과 밥그릇의 위치를 바꾸고 숟가락은 왼손, 젓가락은 오른손으로 바꿔잡았다. 가족들은 사사건건 찾아다니며 왼손을 못쓰게 했다.

그러나 새끼를 꼬는 일만은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사실 가족들은 내가 왼새끼를 꼬는지 오른새끼를 꼬는지 몰랐을 것이다. 아버지의 옆자리에서 묵묵히 새끼만 꼬던 아이는 50대 후반이 돼서도 왼손으로는 숟가락을, 오른손으로는 젓가락을 잡는다.

11월 중순의 벌판은 황량하다. 묵직했던 벼이삭이 땅에 닫기도 전에 콤바인이 이삭을 모조리 훑어버리고, 땅에 뿌리박고 있던 벼포기는 흔적도 없이 마시멜로처럼 생긴 곤포사일리지(梱包 silage)에 둘둘 말려져 벌판에 덩그러니 서있다. 그렇게 흔하던 짚이 농촌에서조차 찾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짚으로 만드는 것 중 새끼만큼 요긴한 것도 많지 않다. 특히 왼새끼는 부정(不淨)한 것들의 범접을 막는 주술적인 힘을 갖고 있어 ‘금줄’로 불린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금줄이 쳐지면 잡귀들이 이 선을 넘보지 못하게 된다. 왼새끼의 위력은 아기를 보호하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다. 경상도지방에서는 출산한 집의 금줄을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가면 손이 오그라든다고 하여 이를 절대 어기지 않는다. 서울에서는 금줄을 치기 위해 문기둥에 못을 박으면 아기에게 눈병이 생긴다하여 못 박는 일을 금기시하고 있다. 생솔가지, 숯, 빨간고추 등을 끼워넣은 왼새끼는 아버지가 꼰, 어머니의 탯줄 같은 것이다.

▲ 금줄

아버지 날 낳아 금줄 치실 때,/ 일품으로 꼬아 나가셨을/ 왼새끼의 맵시처럼 단아하게/ 참 일품으로/ 어기차게 왼세월을 틀어올려/ 산지 사방으로 늠름하게 뻗어나간/ 등꽃불 환한 나무야 저만큼 나앉거라/ 오늘은 나도 왼새끼 꼰다/ 참 일품으로/ 단아하게 꼬아올린 왼새끼를/ 대문간에 처억 걸어놓고 싶었던 것이다/ 왼새끼 사랑, 왼새끼 사랑······왼새끼를 꼬다(이중기)

필자는 지금도 왼새끼를 잘 꼰다. 한번 배워놓은 새끼 꼬는 법은 왼손을 타고 아들에게까지 흘러들어가 그 녀석도 이젠 왼새끼를 꼰다. 11월 하순으로 넘어가던, 부엉이 부엉부엉 울던 내 어렸을 적 밤 풍경이 문득 떠오른다. 그 때 사랑방에서 아버지는 오른새끼를 꼬았고, 아들은 왼새끼를 꼬았다. 아버지는 옆에 앉아 열심히 꼬고 있던 아들의 왼새끼를 말없이 지켜보았으리라. 내가 지금 아들에게 그리 하듯이. 이재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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