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감정에도 유통기한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슬픔이나 고통, 두려움도 일정한 기한이 지나면 통조림처럼 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지만 그게 어찌 마음처럼 잘되는 일일까?

2019학년도 수능 시험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특히 국어영역에서 역대급 불수능이라 불릴 정도로 지나치게 어려웠다는 논란이 거세다. 지난 11월15일 수능 당일, 난 국어교사로서, 수험생을 둔 아버지로서 아침부터 가슴이 초조했다. 8시40분 드디어 1교시 국어 시험이 시작 되었고, 12시쯤 인터넷에 국어 문제지가 올라왔다. 작년처럼 또 어렵지는 않을까? 그래도 지난 9월 치른 모의 평가를 보면 작년보다는 좀 쉽게 출제 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1~3번 문항의 화법 지문을 대하면서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제지를 넘길수록 설명하기 어려운 아득한 두려움 같은 것이 몰려왔다. 아니다 다를까 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은 1번 문항부터 멘탈 붕괴의 조짐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시험을 마친 후 어떤 수험생들은 부모를 보자마자 ‘엄마 미안해’ 하면서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수능 다음날 우리 반 학생 하나도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올해도 여전히 수능출제 관계자는 “올해 수능도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수한 수험생이라면 문제를 풀 수 있는 수준으로 출제했다”고 밝혔다. 헛웃음이 나온다. 제발 숟가락, 젓가락 같은 판에 박힌 출제 브리핑은 하지 말았음 하는 바람이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 보면,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장면이 있다. “왜 젓가락은 시옷받침인데, 숟가락은 디귿받침이야?” 국문과에 다니고 있는 남자 주인공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응…. 그게 젓가락은 ㅅ모양으로 집어 먹으니까, 숟가락은 이렇게 퍼먹으니까…. 숟가락이 ㄷ 같이 생겼잖아.” 하면서 얼버무리자 여자주인공은 “너 국문과 다니는 거 맞아?” 하면서 핀잔을 준다.

이번 문법 문제에 바로 이 ‘숟가락’과 ‘젓가락’의 받침의 차이를 조선전기 중세 국어와 관련지어 묻는 문항이 출제 되었다. 이 문항과 관련된 지문은 대학 논문 수준의 글처럼 읽혀졌다. 고등학교 문법 교육과정에 이렇게 깊이 있게 다루는 문법 교과서는 없다. 아마도 출제자는 참신한(?) 문항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만유인력과 중국의 천문학을 결합한 31번 문제, 수험생들의 멘탈 붕괴의 결정판이 아니었나 싶다. 무려 두 바닥 가득 전문 용어가 이어진 과학과 철학이 융합된 난해한 지문에다, 방대한 분량의 <보기> 글에도 생소한 용어가 쏟아지고, 또 5개의 선지의 길이가 각각 세 줄에 이르는 거대 문항이었다. (국어영역은 80분의 시간에 45문항을 풀어야 한다. 따지자면 1문항 당 2분 이내에 풀어야 할 문항 수이다.)

그렇다면 먼저 그 난해한 지문과 <보기> 글을 읽고 이해한 후, 다시 5개의 선지에 적용해야 하는 31번 문항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능시험이 끝나면 해마다 듣게 되는 ‘물 수능’, ‘불 수능’이란 말들. 아이들의 눈에 눈물을 나게 하고, 아이들의 눈에 불같은 분노가 일어나는 이런 극단적인 수식어가 제발 붙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경식 삼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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