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함 찾아오는 계절 가을
영화속 명장면과 대사 통해
마음의 위안 얻었으면…

▲ 강혜경 전 경성대학교 교수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이사

가을! 떨어져 뒹구는 거리의 낙엽과 시린 바람에 문득 공허함이 찾아오고…. 누군가의 이야기나 글에서 아니 영화 속 장면과 대사에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과 깨달음으로 삶의 단서를 탐색하게 되는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인생 2막, 신중년을 위한 영화치료 수업에 열기가 더해 간다. 두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영화 속 다양한 인물과 사건, 상황의 전개과정을 통해, 영화 밖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가장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몇 편의 영화 속 명장면과 대사로 초대한다.

여성감독 도리스모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2009>은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남겨진 중년기 남편과 가족관계를 들여다보게 하는 수작이다. 영화 속 벚꽃은 덧없음의 가장 아름다운 상징이며, 파리는 욕망의 하루를, 부토 춤은 삶과 죽음을 양면을 그리고 후지산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삶을 비유한다. 아내의 잠옷을 침대에 펼쳐두고 함께 누워있는 장면, 코트 속에 아내의 옷과 목걸이를 한 체 벚꽃 앞에 서서 “자 여보, 당신을 위한 거야.” 라고 말하던 루디(남편)의 모습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전 엄마가 시간 날 때 갖고 노는 인형이었죠. 제가 아프거나 말을 안 들으면 유모에게 줘 버렸어요. 엄만 문 닫고 일했고, 아무도 방해해선 안 되었죠…. 늘 다정했지만 마음은 딴 데 가 있었어요. 뭘 물어도 대답을 안하셨구요…. 전 죽기 살기로 엄마를 사랑했어요. 하지만 엄마를 믿을 수 없었어요. 눈빛과 말이 틀렸거든요.” 가을의 서정과 소나타라는 음악형식이 결합된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가을 소나타, 1978>. 전 세계로 연주 여행을 하며 피아니스트로서의 성공을 중요시했던 샬롯(엄마)에게, 늘 그리움의 대상으로 사랑받고 싶었던 에바(딸)가 버려졌던 내면의 상처로 절규하는 장면이다. 엄마와 딸의 이름으로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 누구의 입장이 수용되는지? 삶도 끊임없이 배우고 연습해야 함을 보여준다.

“조발성 알츠하이머 환자로 매일 상실의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내 태도를 상실하고 목표를 상실하고 잠을 상실하지만, 기억을 가장 많이 상실하죠…. 남편을 처음 만난 그날 밤, 저의 첫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아이를 가졌을 때, …… 기억을 못하는 제 자신을 질책하곤 하지만,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순간도 있습니다. 제가 고통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고통 받고 있지 않습니다.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요.” 실존적 존재로서의 나다운 삶을 이야기하는 <스틸 앨리스, 2014>.

“난 늘 앞으로의 행복만을 바라보고 살아왔어. 결혼하면 행복하겠지, 애 낳으면 행복하겠지. 애들 독립하면 오순도순 살아야지…. 이제는 더 이상 바라볼 것이 없는데, 난 아직도 행복을 꿈꾸는데, 이렇게 빈껍데기처럼 살아야 돼? 난 행복할 권리도 없어?” 결혼 30년차 부부의 밋밋한 사랑과 일상의 탈출을 꿈꾸는 메릴스트립의 소녀감성 연기가 귀엽고 맛깔나는 <호프 스프링즈, 2012>. 80년대 전쟁터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에릭 포페 감독이 실제 자기경험을 바탕으로 레베카(종군 여기자)의 삶, 신념대로 산다는 것과 가정과 일에서 고민하는 여성의 삶을 그려낸 <천번의 굿나잇, 2014>. 홀로 죽음을 맞이한 망자의 유품을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가족이나 지인의 연결고리가 되어줄 단서를 찾아 초대하고, 추도사를 작성하고 장례를 치르는 22년차 공무원 존 메이. 그의 일상을 통해 삶의 가치와 고독사, 그리고 장례문화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보여주는 <스틸 라이프, 2013>.

‘좋은 영화든 나쁜 영화든 유쾌한 캐릭터든 유쾌하지 않은 캐릭터든, 유쾌한 결말이든 우울한 결말이든 치료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미학이 아니라, 영화가 얼마나 우리 삶의 고통과 공명하는가’이다. 비르기트 볼츠의 문구를 떠올리며….

마음에 바람이 부는 깊은 가을 저녁, 누구랑도 좋고 혼자라도 좋고, 영화관 나들이를 권한다.

강혜경 전 경성대학교 교수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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